무림 천하의 운명이 걸린 단 하나의 대결.
그것은 단순히 영웅의 칭호나 문파의 명예를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혼돈의 기운이 하늘을 뒤덮고, 사악한 세력이 봉인된 지 오래된 고대 마물을 부활시키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파다하던 때, 정파와 사파를 망라한 모든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천하의 균형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장 순수한 무인의 기운으로 수천 년 묵은 봉인석을 재활성화하는 것. 그리고 그 순수한 무인을 가려낼 무대는 바로, 대륙 최고의 무술 대회, ‘천하제일 무도회’였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유서 깊은 대회의 결승전, 백룡 경기장은 터져 나갈 듯한 함성으로 가득했다. 무림인들의 시선은 오직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한 명은 ‘매화검선’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매화(梅花). 그녀의 검은 매화처럼 고결하고 차가웠으며, 단 한 번 휘둘러도 적의 모든 흐트러짐을 잡아내는 정교함으로 유명했다. 흰 도포 자락이 살랑이는 고요한 움직임 속에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인함이 뿜어져 나왔다. 무표정한 얼굴과 얼음장 같은 눈빛은 그녀가 얼마나 이 대회를 진지하게 여기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다른 한 명은 ‘번개신검’이라는 괴이한 별호를 가진 번개(霹靂). 그는 매화와는 정반대의 남자였다. 번개처럼 빠르고 강력하며,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로 상대를 압도했다. 그의 검술은 정교함보다는 파괴력에 중점을 두었으며, 가끔은 지나치게 과장된 동작으로 관중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결승에 올라온 지금까지도 그의 얼굴에는 호기심 가득한 미소와 승부욕이 뒤섞여 있었다. 매화는 이 번개가 몹시 못마땅했다.
“젠장, 저 인간 또 시작이군.”
매화는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번개는 경기장 중앙에 서서 관중들에게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가 하면, 갑자기 허공에 대고 번개 무늬를 그리며 손가락을 튕기는 기이한 동작까지 선보였다. 경기장이 환호성으로 들썩였고, 일부 여인들은 얼굴을 붉히며 손수건을 흔들었다.
매화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대회에서, 저렇게 가볍고 경망스러운 자가 결승까지 올라오다니. 심지어 그와 결승에서 맞붙어야 한다니!
“번개신검, 매화검선!”
경기장 주심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승전을 시작한다!”
번개는 그제야 장난스러운 미소를 거두고 매화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빛은 아까와는 사뭇 달랐다. 장난기는 사라지고, 오직 강자와 강자가 마주했을 때 뿜어져 나오는 깊고 날카로운 빛만이 번뜩였다.
“매화검선님. 드디어 이 번개가 그대와 겨룰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매화조차도 경계할 수밖에 없을 만큼 강렬했다. 매화는 말없이 자신의 애검, ‘설화(雪花)’를 뽑았다. 검집에서 빠져나온 검날은 백룡 경기장의 조명 아래 영롱하게 빛났다.
“번개신검. 그대의 무공은 일품이나, 예의는 낙제점이오.”
매화의 차가운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번개는 순간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하하, 칭찬이 너무 과하시오! 제 무공이 그리 대단한가요? 예의는…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뻔뻔함에 매화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그는 매화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저런 바보 같은…!’
매화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곧추세우고 자세를 잡았다. 싸움은 시작되었다.
번개가 먼저 움직였다. 그의 발은 보이지 않는 번개처럼 땅을 박차고 매화에게로 돌진했다. 검은 그림자처럼 휘둘러졌고, 그 검 끝에서는 맹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매화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녀의 설화는 번개의 맹공을 막아내며 때로는 흘려내고, 때로는 쳐냈다. 쨍그랑, 쨍그랑! 맑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매화의 검 끝에서 피어나는 서릿발 같은 기세는 천지를 얼어붙게 할 듯했으나, 번개의 장풍은 태산조차 날려버릴 기세였다. 두 기운이 부딪히는 순간, 경기장이 휘청거렸다. 젠장, 이러다 건물 무너지겠네. 몇몇 관중은 불안한 듯 비명을 지르며 좌석 뒤로 몸을 숨겼다.
번개는 거칠게 공격했지만, 매화는 흔들림 없이 그를 받아냈다. 그녀의 움직임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그림 같았다. 번개가 옆구리를 노려 검을 찔러 넣자, 매화는 몸을 유려하게 틀어 그의 검을 피하고는 설화로 그의 손목을 겨냥했다. 번개는 순간적으로 검을 빼내며 뒤로 물러섰다.
“크으, 역시 매화검선! 한 수 한 수가 모두 비수와 같소!”
번개가 감탄하며 말했다. 매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빛으로 다음 공격을 준비할 뿐이었다.
공격 도중, 번개의 검 끝이 매화의 새하얀 도포 자락을 스쳤다. 섬세하게 수놓인 매화 문양이 새겨진 도포가 살짝 찢어졌다. 매화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런! 실수였습니다!”
번개가 뒤늦게 당황하며 외쳤다. 그는 한 번씩 이런 식으로 허점을 드러내 매화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그는 정말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자리에서 도포 걱정을 하는 것인가?
매화는 그에게 반격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설화는 찢어진 도포 자락을 스치며 번개의 옆구리를 향해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번개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비틀어 검을 피했지만,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휘청이던 번개의 몸이 매화를 향해 기울었다. 매화는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손을 뻗었지만, 타이밍이 절묘하게 어긋났다. 번개의 몸이 매화의 품으로 그대로 와락 안겨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매화가 그를 밀어내려던 손이 번개의 등짝에 닿는 순간, 번개의 몸이 통나무처럼 쓰러진 것이었다. 매화는 번개의 엉거주춤한 몸을 안은 채 경기장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그리고 번개는, 운명처럼 매화의 위로 쓰러졌다.
백룡 경기장을 가득 채우던 함성도, 경외로운 침묵도, 그 순간 모두 얼어붙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번개의 푸른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미안함, 그리고 묘한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매화의 검은 눈동자는 분노와 어이없음, 그리고 조금은… 당황스러움으로 일렁였다.
매화의 귓가에는 번개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묘하게 익숙한 그의 비누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저… 저기… 매화검선님?”
번개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보기 드물게 붉어져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매화는 최대한 차분하게 물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오해입니다! 아니, 오해는 아닌데, 제가 의도한 건 결코 아닙니다!”
번개는 허둥지둥 변명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매화의 가슴께를 짚었고, 그 순간 매화의 눈빛은 살벌한 냉기로 번뜩였다.
“이 손, 당장 치우시오.”
매화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번개는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그제야 겨우 몸을 일으킨 번개는 매화에게 팔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매화는 번개의 손을 무시하고 혼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도포는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아까 찢어진 자리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매화는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것이 저 칠칠치 못한 번개 때문이었다.
“다시 시작하시오.”
매화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번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아까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검을 잡았다.
다시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전과는 뭔가 달랐다. 매화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졌고, 번개는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매화의 검 끝이 번개의 심장을 노리자, 번개는 검으로 방어하다가도 문득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매화는 그 시선을 느끼고는 순간적으로 살짝 당황했다.
그는 이전처럼 능글맞게 웃지도, 너스레를 떨지도 않았다. 오직 진지한 눈빛으로 매화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러다 다시 한번, 번개의 발이 삐끗했다.
‘저 멍청이가 또…!’
매화는 속으로 외쳤다. 번개는 이번에는 경기장 바닥의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린 모양이었다. 그는 크게 휘청이더니, 그만 검을 놓쳐버렸다. 그의 검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매화는 승리할 기회를 잡았다. 그녀는 주저 없이 설화를 휘둘러 번개의 목을 겨냥했다. 승리의 여신이 그녀에게 미소 짓는 듯했다.
그때, 번개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매화의 검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매화검선님… 다치지 마십시오!”
그가 외친 말은 매화의 심장을 꿰뚫었다. 매화의 검은 번개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외친 말은 이상하게도 매화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매화가 자신을 해치는 과정에서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매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가운 이성을 지닌 그녀에게, 번개의 이 순수하고도 바보 같은 배려는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칼날 끝에서 뿜어져 나오던 서늘한 기운이 한순간에 흩어지는 듯했다.
“매화검선님, 검… 거두십시오.”
번개는 천천히 눈을 뜨고 매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까의 당황스러움이나 장난기가 아닌, 묘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매화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거두었다.
경기장은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었다. 주심마저도 이 기묘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얼어붙어 있었다.
“저… 제가 졌습니다.”
번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매화의 심장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울렁이게 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매화검선님의 검이 닿는 순간, 제 심장이… 저도 모르게 뛰어버렸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매화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뛰었다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린가! 그것도 천하제일 무도회 결승전에서, 검을 들이대고 있는 상대에게!
“번개신검! 지금 무슨 농을 치는 것이오!”
매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번개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농이 아닙니다. 저는 거짓말은 못 합니다. 그대의 검을 막아내는 동안에도, 그대의 숨결이 느껴지는 순간에도, 어째서인지 제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그의 말은 전혀 설득력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묘하게 진심을 담고 있었다. 매화는 혼란스러웠다. 천하의 매화검선이 이리도 당황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그대는 고작 그런 감상 때문에 천하의 운명이 걸린 대회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오?”
매화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번개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처럼 능글맞지 않고, 왠지 모르게 설렘을 담고 있는 듯했다.
“어쩌겠습니까. 천하의 운명보다 제 심장의 운명이 더 중요한 걸요.”
그의 한마디에 경기장은 다시 술렁거렸다. 몇몇은 웅성거렸고, 몇몇은 기함했고, 몇몇은 얼굴을 붉히며 박수를 쳤다.
“매화검선님, 제가 졌습니다. 그러니 천하의 운명은 그대에게 맡기겠습니다.”
번개가 허리를 숙여 매화에게 깊이 인사했다. 그리고는 쑥스러운 듯 손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매화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제 망설임 없이 매화를 향해 있었다.
“대회가 끝나면… 저와 팥빙수라도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매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심장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혼란스러운 속도로 뛰고 있었다. 천하제일 무도회에서, 천하의 운명이 걸린 결승전에서, 그녀는 방금 고백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엉뚱하게도 팥빙수 한 그릇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날, 천하제일 무도회의 우승자는 매화검선 매화가 되었다. 그녀는 봉인석을 성공적으로 재활성화했고, 혼돈의 기운은 다시금 잠잠해졌다.
하지만 무림에 떠도는 새로운 소문은 이러했다.
매화검선이 대회가 끝난 후, 번개신검과 함께 백룡 경기장 근처의 한 다과점에서 팥빙수를 먹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것.
그리고 매화검선이 팥빙수에 든 떡을 몰래 집어 먹으려다, 번개신검에게 들켜 호되게 당황했다는 소문도 함께였다.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은 그렇게, 한 쌍의 어설픈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엉뚱한 로맨틱 코미디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