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는 잿더미와 함께 숨 쉬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잔해는 병든 피부처럼 여기저기 흉터를 드러냈고, 그 위로 이름 모를 넝쿨 식물들이 독점적으로 번성하며 녹색의 장막을 드리웠다. 바람은 끊임없이 희미한 먼지와 잊힌 과거의 냄새를 실어 날랐다. 이곳, 한때 ‘서울’이라 불렸던 거대한 무덤의 심장부에서, 이현우는 살았다.
그의 거처는 붕괴된 도서관의 최상층이었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나갔지만, 그는 버려진 철판과 두꺼운 책들로 외부를 완벽하게 차단해두었다. 햇빛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가 전부였고, 내부는 늘 고요하고 어두웠다. 먼지 낀 공기 속에서 그는 낡은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앉아, 스크랩된 종이 조각들과 손으로 그린 지도를 늘어놓은 작업대 위로 몸을 숙였다. 그의 옆에는 작동하지 않는 낡은 라디오와 반쯤 비워진 통조림 캔, 그리고 차가운 물이 담긴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깥세상은 사나웠다. 식량은 희귀했고, 위험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재앙’ 이후 15년. 인류는 소수의 생존자 집단으로 쪼개져 서로를 경계하거나, 혹은 미지의 위협에 맞서 싸우며 연명하고 있었다. 살인? 절도? 그런 것들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법과 질서의 개념은 재앙과 함께 무너져 내렸고, 남은 것은 오직 생존 본능뿐이었다.
하지만 이현우는 달랐다. 그는 생존자라기보다, 관찰자에 가까웠다. 그의 생존 방식은 육체적인 강인함이나 뛰어난 전투 기술이 아니었다. 그의 무기는 오직 ‘두뇌’였다. 그는 재앙 이전에도 ‘명탐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폐허 속에서도, 간혹 ‘불가능한 문제’에 직면한 이들이 찾아오는,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문제 해결사’였다.
“똑똑.”
낮게 울리는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이현우는 미동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군. 며칠 전, 무전기를 통해 들어온 희미한 목소리가 한 가지 사건을 의뢰했다. 거절했지만, 그들의 절박함은 이 폐허의 공기만큼이나 끈질겼다.
“이현우 씨? 계십니까?”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젊고, 조금은 겁에 질린 듯한. 이현우는 안경을 벗어 작업대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조용했다. 낡은 작업복은 그의 마른 몸에 헐렁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는 작업대 뒤쪽의 좁은 통로를 지나 두꺼운 철문을 향했다. 문의 작은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철판으로 보강된 계단 아래,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스무 살 초반쯤 되었을까. 얇은 천으로 만든 옷차림에 얼굴은 먼지와 피로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에 홀린 듯 간절했다.
“누구세요?” 이현우는 목소리를 일부러 낮고 건조하게 만들었다.
여자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새벽 마을에서 왔습니다. 서연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에… 무전 드렸습니다.”
새벽 마을. 이현우가 아는 한, 이 폐허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소규모 공동체였다. 비교적 잘 정돈된 요새를 이루고, 작은 밭을 일구며 생존하고 있다고 들었다.
“거절했습니다만.” 이현우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시시한 일이 아닙니다!” 서연의 목소리에 갑자기 힘이 실렸다. “이건… 이건 살인입니다! 밀실 살인이에요!”
밀실 살인. 이현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재앙 이후, 수많은 잔혹한 죽음이 있었지만, ‘밀실’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것이었다. 폐허 속에서 그런 치밀함을 구현할 수 있는 살인자가 존재할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흥미롭군요.” 이현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들어가세요.”
철문이 안쪽으로 삐걱이며 열렸다. 서연은 망설이다가 이현우의 지시에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닫힌 문 너머로 바깥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현우는 다시 구멍을 막아두고, 서연을 지나쳐 작업대로 향했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앉으시죠.” 그가 손짓한 곳은 낡은 상자 더미였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걸터앉았다.
“무엇을 드려야 할까요? 식량? 아니면… 필요한 부품이 있으신가요?” 서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낡은 라디오와 정체불명의 기계 부품들 위를 훑었다.
“아니요. 그런 건 관심 없습니다.” 이현우는 천천히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이야기만 해주세요. 당신들이 ‘밀실 살인’이라 부르는 그 사건에 대해.”
서연은 마른침을 삼켰다. “네… 저희 마을의 방역 담당이자, 의료팀장이신 박종수 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제 새벽에요.”
“사인은?”
“목이 졸려 살해당했습니다.”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분이 계시던 방은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창문은 나무판자로 완벽하게 막혀 있었어요. 심지어 환기구도 너무 작아서 사람의 몸이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 방은… 외부와 완벽히 단절된 밀실이었습니다.”
이현우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작업대 위를 탁탁 두드렸다.
“저희 마을은 폐기된 병원 건물을 요새로 쓰고 있습니다. 박 팀장님은 병원 2층, 옛날에 격리 병동으로 쓰이던 곳의 한 방을 개인 연구실로 쓰고 계셨어요. 그 방은 원래부터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재앙 이후에도 저희가 몇 번이나 점검해서 더 튼튼하게 보강했고요.”
“시신은 누가 발견했죠?”
“박 팀장님은 매일 아침 7시에 마을 중앙 광장에 있는 식수 공급 시설을 점검하셨어요. 그런데 어제 7시 30분이 넘어도 나오시지 않는 겁니다. 불안해진 저희 이장님이 몇 명과 함께 팀장님 방으로 가셨죠.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자,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 참혹한 모습을 본 거죠.”
“시신은 발견 당시 어떤 상태였습니까?”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목에 선명한 교살 흔적이 있었고… 주변은 전혀 흐트러져 있지 않았습니다. 마치 팀장님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가 갑자기 습격당한 것처럼요.”
“그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갈 만한 경로가 전혀 없었단 말입니까?” 이현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네, 절대로요! 문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열쇠는 팀장님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창문은 밖에서 두꺼운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었고, 내부에서는 저희가 못을 박아서 고정시켰습니다. 창문을 통해서는 개미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을 거예요. 환기구도 마찬가지고요.” 서연은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유창하게 설명했다.
“그럼 자살은요?”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박 팀장님은 오른손잡이세요. 그리고 교살 흔적은 목 뒤에서 앞으로 향하는 형태였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목을 그렇게 조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요. 게다가 팀장님은 생존 의지가 아주 강한 분이셨습니다. 마을의 유일한 의료진이었으니까요.”
이현우는 잠시 침묵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밀실 살인’이라. 그것도 모든 경로가 차단된 완벽한 공간에서. 흔히 말하는 ‘보이지 않는 범인’이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왜 나를 찾아왔죠? 당신들 마을에도 충분히 똑똑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마을 이장님이… 당신의 소문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재앙 이전부터 어떤 사건이든 해결해냈다고… 사람들이 ‘천재 탐정’이라고 불렀다고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는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누가 범인인지도 모른 채, 밀실에서 살인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모두가 겁에 질려 있어요. 이대로는 공동체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이현우는 폐허가 된 세상을 떠올렸다. 작은 공동체 하나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외부의 위협뿐만 아니라, 내부의 불신과 공포가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현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연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이 스쳤다.
“조건은 있습니다. 우선… 이동 수단. 그리고 돌아올 때까지의 최소한의 식량.” 이현우는 항상 최소한의 필요만 요구했다. 돈은 이 시대에 무의미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해결된 후에, 당신들이 보존하고 있는 ‘재앙 이전의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특히 고문서들.”
서연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고문서요? 그게 왜…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녀는 이현우의 의외의 요구에 의아했지만, 망설이지 않고 승낙했다. 마을의 귀한 자원인 식량과 기록들을 내어주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이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내하시죠. 당신들의 ‘완벽한 밀실’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서연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현우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이현우는 도서관의 좁은 계단을 내려갔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칙칙하고 황량했다. 하늘은 두꺼운 먼지층으로 뒤덮여 있었고, 앙상한 건물들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서연이 가리킨 곳에는 낡은 자전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녹이 슬었지만 아직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저희가 쓸 수 있는 가장 빠른 이동 수단입니다.” 서연이 미안한 듯 말했다.
이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자전거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길은 차로 가기 힘들 테니까요.” 그는 짐 칸에 작은 가방 하나를 싣고 서연에게 뒤에 타라고 손짓했다.
덜컹거리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이현우는 도시의 잔해를 가로질렀다. 서연은 그의 뒤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새벽 마을’. 그리고 그곳에 숨겨진 ‘불가능한 살인’의 진실이었다. 이현우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가설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도 인간의 악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리고 그 악의는, 때로는 가장 기묘하고 불가사의한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마치 이 도시를 삼켜버린 재앙처럼.
서연은 조용히 뒤에 앉아 이현우의 앙상한 등을 바라봤다. 그의 외모는 영락없는 폐인 같았지만, 그가 풍기는 기묘한 아우라는 그녀에게 일말의 안심을 안겨주었다. 저 사람이라면, 정말로 이 불가사의한 공포를 해결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연은 굳게 다문 입술을 깨물었다. 마을의 미래는 이제 저 탐정의 손에 달려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