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을 찌를 듯 솟아 오른 오악(五嶽)의 정기가 한데 모인 곳, 중원의 심장부에 자리한 용무봉(龍武峰)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수만 군중이 운집하여 산자락을 가득 메웠고, 오색 찬란한 깃발들은 바람에 펄럭이며 마치 살아있는 용들이 승천하는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햇살은 비무대 위를 찬란하게 비추었으나, 그 빛 속에는 장엄함과 동시에 섬뜩하리만큼 거대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오직 한 명의 진정한 영웅만이 천하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전설, 그 전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름하여, 천하운명결(天下運命決).
“젠장,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평범하기 그지없는 회색 도포를 걸친 한 사내가 군중의 틈바구니에서 고개를 들었다. 백무진. 그의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운 군중의 열기와는 사뭇 다른, 고요하면서도 깊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한 손에는 언제나 그의 옆을 지키는 낡은 목검이 쥐어져 있었으나, 그 모습은 마치 길을 잃은 방랑객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어제까지만 해도 강호의 이름 없는 한 구석에서 홀로 무예를 수련하던 무명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전, 강호 전체를 뒤흔든 ‘묵룡변(墨龍變)’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천하의 기운이 뒤틀리고, 혼탁한 마기(魔氣)가 창궐하며 무림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 혼돈 속에서, 천하운명결이 선포되었다. 명목은 가장 강한 자가 마기를 제압하고 천하를 구할 영웅이 되는 것이었지만, 이면에는 각 문파의 패권 다툼과 숨겨진 음모가 꿈틀대고 있음을 무진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이, 거기! 길 막지 말고 얼른 비켜!”
거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무진의 어깨를 툭 밀쳤다. 돌아보니, 한껏 멋을 부린 비단 옷차림의 젊은 무사가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등에 매달린 꽤나 값비싸 보이는 검이 그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듯했다.
“저기요, 앞이 안 보이십니까? 이 중요한 날,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저 구석으로 비키시죠.”
무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젊은 무사의 오만함에 흔들리지 않고, 마치 투명한 물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는 듯했다. 젊은 무사는 무진의 반응 없는 태도에 더욱 기분이 상한 듯 코웃음을 쳤다.
“쯧쯧, 촌놈이 어쩌다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는지. 주제를 모르고 감히 이런 성스러운 자리에….”
그는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갑자기 무진의 뒤편에서 거대한 기운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쿵, 쿵, 쿵! 땅이 울리고 공기가 진동했다. 저 멀리, 용무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작대로(朱雀大路) 위로 압도적인 기세를 풍기는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청운검(靑雲劍) 남궁천(南宮天)!”
군중 속에서 환호와 경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옥룡검문(玉龍劍門)의 문주, ‘청운검’ 남궁천은 구름을 가르듯 위엄 있는 발걸음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그의 새하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검기는 주위의 열기를 일순간 제압하는 듯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옥룡검문의 제자들 역시 하나같이 뛰어난 기세를 자랑했다.
“그리고… 흑염마군(黑焰魔君) 사도린(司徒璘)!”
이번에는 숙연함과 동시에 섬뜩한 비명이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교(魔敎)의 젊은 교주, ‘흑염마군’ 사도린은 검은 깃발을 앞세운 마교의 무리들을 이끌고 등장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마기는 햇살조차 삼켜버릴 듯한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검은색의 비단 옷을 입은 사도린의 얼굴에는 냉담한 조소가 걸려 있었고, 그의 붉은 눈동자는 천하를 깔보는 듯한 오만함을 담고 있었다.
남궁천과 사도린은 비무대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은 만나자마자 아무런 대화도 없이 서로를 향해 뿜어내는 기세만으로도 주위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팽팽한 살기(殺氣)가 용무봉 전체를 휘감았고, 군중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그들의 대치에 압도되었다.
무진은 그들의 기세를 온몸으로 느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천하의 운명이라….’ 그의 가슴 한편에는 잊고 싶었던 오래된 상처가 다시금 아릿하게 솟아나는 듯했다. 그는 남궁천의 곧은 기상과 사도린의 섬뜩한 마기를 고요히 응시했다. 저들은 무림의 최강자들. 자신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강자들이었다.
그때, 누군가 무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어이, 이보게! 정신 차리게! 저분들이 바로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들이야.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광경이라고!”
옆에서 잔뜩 상기된 얼굴로 떠들어대던 낯선 사내의 말에도 무진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는 그저 다시 비무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비무대 위에는 이미 수십 명의 무림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각 문파를 대표하는 인물들, 강호에 이름을 떨친 은거 기인들, 그리고 자신처럼 아무도 모르게 대회에 참가한 젊은 무인들까지. 천하의 강자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었다.
용무봉 정상에 마련된 거대한 비무대 위로 백발의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맹(武林盟)의 맹주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태산북두(泰山北斗)’ 철무량(鐵無量)이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비로소 용무봉을 가득 메웠던 소란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철무량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려 퍼지며 용무봉 전체를 흔들었다.
“모든 강호인들이여! 오늘 우리는 이곳, 용무봉에 모였다. 묵룡변으로 인해 혼탁해진 천하를 구하고, 무림의 명운을 결정할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군중은 압도되었다.
“천하운명결은 단순히 무위를 겨루는 자리가 아니다. 천하의 존망(存亡)이 걸린 마지막 시험이 될 것이다. 오직 가장 강하고, 가장 올바른 마음을 지닌 자만이 이 천하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철무량의 연설이 끝나자, 용무봉의 하늘에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장하고 비장한 소리가 온 산을 뒤흔들었다. 이 소리는 천하운명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무대에 모여 있던 모든 무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함께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무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옅은 기운이 맴도는 것을 느끼며, 그는 비무대를 향해 굳건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어깨에 얹힌 것은 단순히 개인의 영광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천하의 운명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자, 시작이다….”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작은 중얼거림은, 용무봉의 웅장한 징소리에 묻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마치 깨어나는 묵룡(墨龍)처럼 깊고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하운명결의 서막이 이제 막 오른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