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개벽(開闢)의 소리**
천하가 숨을 죽였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무림의 질서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은, 불과 보름 전의 일이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을 찢고 솟아난 거대한 균열,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알 수 없는 기운은 강호를 일순간 공포로 뒤덮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점차 형체를 갖추더니, 이내 거대한 ‘문’이 되어 무림맹의 심장부, 낙양성 서쪽 평야에 굳건히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계(異界)의 문’이라 불렀고, 무인들은 본능적으로 그 안에 도사린 미지의 위험을 ‘던전’이라 명명했다.
지금, 그 던전의 입구 앞, 수백 척의 높이로 솟아오른 검은 석문을 배경으로 하여, 천하의 모든 강호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정파, 사파, 마교를 막론하고 이름께나 알려진 문파와 세력들이 총집결한 자리였다. 저마다의 문파를 상징하는 화려한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고, 그 아래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무인들의 눈빛은 긴장과 호기심,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번뜩였다.
“크으… 이토록 많은 강호의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개벽 이래 처음이 아닐까?”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십 평생을 강호에서 보낸 노무인의 말에는 경외감과 함께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평소라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원수지간들이, 지금은 기묘한 침묵 속에서 같은 하늘 아래 서 있는 풍경은 분명 진기한 것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거대한 석문 앞에 마련된 임시 단상 위, 무림맹주 천우진을 필두로 한 각 세력의 수뇌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평소의 여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이윽고 무림맹주 천우진이 조용히 단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으나, 그가 내뿜는 기세는 거대한 산맥처럼 묵직했다. 수천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고, 장내를 가득 채웠던 웅성거림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직 바람 소리만이 깃발들을 흔들며 웅장한 침묵을 맴돌았다.
“강호의 영웅들이여.”
천우진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강철 같은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의 음성은 장내 모든 무인들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보름 전, 이계의 문이 열린 이래, 천하는 한시도 평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던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한 기운은 초목을 시들게 하고, 짐승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심지어 간혹 문이 살짝 열릴 때마다 튀어나오는 이형(異形)의 괴물들은, 아무리 이름 높은 고수들이라 할지라도 홀로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들이었다.
“우리는 던전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재앙이라 생각했으나,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대지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강호는 물론이요, 세상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치달을 것이다.”
천우진의 얼굴에 비장함이 스쳤다.
“이에 무림맹은 각 세력의 동의를 얻어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이 재앙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 우리는 던전의 심장부로 들어가, 이 모든 혼란의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장내에 다시금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던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죽음을 무릅쓰는 행위였다. 수많은 고수들이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일이었다.
“허나, 던전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존재다.” 천우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거대한 석문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깊었다. “그 안에는 우리의 무공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법칙과, 형언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섣부른 행동은 모두를 파멸로 이끌 뿐이다.”
그의 말은 모두가 느끼고 있던 불안감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미 수십 명의 고수들이 호기심과 용기를 가지고 던전의 문을 넘었으나, 그들 중 단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천하제일 무도대회를 개최하려 한다.”
천우진의 선언에 장내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무도대회라니? 이 엄중한 상황에? 하지만 이어진 그의 설명은 그 정적을 납득으로 바꾸었다.
“이 무도대회는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다. 던전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선택받은 자’를 가려내기 위한 시험이다. 던전은 무공의 강함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혜, 담력,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 이계의 기운에 저항할 수 있는 특이한 체질을 필요로 한다.”
“특이 체질이라니요? 맹주님!”
어느새 한 사파의 문주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천우진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던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보통의 무인이라면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심신에 극심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수십 차례 시험한 결과, 극히 일부만이 그 영향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번 대회는 무력뿐 아니라, 이러한 던전에 특화된 능력을 가진 자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장내는 다시 술렁였다. 무공만이 전부라 믿었던 무인들에게, ‘체질’이라는 새로운 요소는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이기에 노력으로 극복하기 어려웠다.
“대회는 총 세 개의 관문으로 이루어진다.” 천우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장내를 정리했다.
“첫 번째 관문은 바로… 저 던전의 입구에서 펼쳐질 것이다. 이곳에 모인 모든 무인들은 각자의 무공을 펼쳐, 던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계의 기운을 잠시나마 제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던전의 기운에 가장 효과적으로 저항하고, 내부로 진입할 자격을 갖춘 자들을 가려낼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석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이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마치 던전 자체가 천우진의 선언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후 두 번째 관문과 세 번째 관문은, 던전 내부에서 진행될 것이다. 던전의 법칙에 따라 변화하는 공간에서, 그대들의 모든 역량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거대한 석문으로 향했다. 던전. 이계의 문. 미지의 재앙.
무림의 존망이, 그리고 천하의 운명이 바로 저 문 너머에 달려 있었다.
“자, 강호의 영웅들이여.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천우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천하제일 무도대회의 첫 번째 관문을 시작한다!”
천우진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치자, 석문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둠의 기운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서서히 응축되어, 수천 명의 무인들이 발 디딘 평야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거대한 압력이 그들을 짓눌렀고, 평범한 무인들은 이미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혼란 속에서, 한 사내가 조용히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짙은 먹색 도포를 두른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이계의 기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거대한 석문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군.’
그 미소는 알 수 없는 자신감과, 동시에 깊은 고독을 머금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거대한 시험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