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먹구름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축축한 냉기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온몸의 솜털을 곤두세웠다. 낡은 원룸의 형광등은 위태롭게 깜빡이다 결국 제 할 일을 잊은 듯 침묵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는 찰나, 지우는 텅 빈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 꺼진 방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삶도 새까맣게 타버린 지 오래였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구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쓰디쓴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고작 반년 전이었다. 지우는 그때까지만 해도 미래를 꿈꾸는 열정적인 예술가 지망생이었다. 아니, 꿈이라기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오랜 시간 피땀 흘려 매달린 프로젝트 ‘데미안의 거울’은 분명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지우야, 너 아니면 누가 이걸 해내겠어? 우린 최고가 될 거야. 함께!”
민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그의 너털웃음,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던 커다란 손, 뜨거운 눈빛. 그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함께 밤을 새우며 그림을 그리고, 논문을 쓰고, 전시회를 준비했다. 그와 나눈 셀 수 없는 대화와 꿈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지우는 민준을 믿었다. 너무나 순수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그녀의 모든 열정, 모든 창의력, 심지어는 외조부모님께 물려받은 마지막 유산까지 기꺼이 쏟아부었다. 민준은 늘 옆에서 그녀를 격려하고 지지해 주었다. 부족한 자금을 위해 그녀가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할 때도, 슬럼프에 빠져 좌절할 때도 그는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런 민준이기에, 그녀는 그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한여름 밤의 신기루처럼 허무하게 부서졌다. ‘데미안의 거울’ 전시회 당일, 지우는 감쪽같이 사라진 민준을 찾았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되는 법이었다. 전시회는 성황리에 시작되었지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민준에게 집중되었다. “천재적인 신예 작가, 최민준, 역작 ‘데미안의 거울’ 공개!” 헤드라인은 그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지우의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단 한 번, 아주 작은 글씨로 언급되기는 했었다. ‘최민준 작가의 아이디어를 보조한 스태프 중 한 명’.*
그날,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의 작품, 그녀의 이름, 그녀의 꿈, 그리고 그녀의 유산까지. 그 모든 것이 민준의 이름으로 둔갑하여 대중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뒤로 이어진 일들은 지우의 삶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민준은 미리 준비해둔 듯 완벽한 증거들을 내세워 지우를 ‘표절범’이자 ‘정신병을 앓는 스토커’로 몰아갔다. 그녀가 준비해둔 모든 자료는 사라졌고, 그녀의 작품을 지지하던 몇 안 되는 교수들마저 민준의 교묘한 이간질에 등을 돌렸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녀의 작업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실수들이 민준에 의해 부풀려져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인의 망상’으로 포장되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일기장까지 동원되었다. 지우가 과거에 겪었던 우울증 기록과 그녀가 민준에게 보냈던 수많은 작업 관련 메시지들이 모두 비정상적인 집착과 망상으로 둔갑해 언론에 공개되었다. 지우는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메아리 속에서 홀로 절규해야 했다.
“네가 한 짓이 대체 뭐야, 민준아!”
지우는 울부짖으며 민준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의 눈에는 지우가 알던 따뜻함은 온데간데없고, 낯선 냉기와 경멸만이 가득했다.
“지우야, 이젠 그만해. 네 정신 건강에 안 좋잖아. 난 너에게 기회를 주려 했어. 재능 없는 네가 그나마 내 옆에서라도 빛을 볼 수 있게. 하지만 넌 너무 과했어. 집착도 정도껏 해야지.”
그의 말은 칼날이 되어 지우의 심장을 도려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민준은 자신을 처음부터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재능, 그녀의 열정, 그녀의 순수함까지도. 그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후 지우는 사회에서 완벽하게 매장당했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늘 ‘표절 작가’, ‘정신병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조롱하고 손가락질했다. 집과 작업실에서 쫓겨나고, 아르바이트 자리조차 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것을.
*더 이상 잃을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지우의 눈이 번뜩였다. 분노와 증오가 그녀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독처럼 퍼져나갔다. 복수심이 메마른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사냥꾼이었다.
문득, 오래전 외조모님이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합리적인 길이 막혔을 때, 절망의 끝에 다다른 자들이 찾아가는 곳. 이 세상의 규칙이 통하지 않는, 그림자 속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는 곳. 어릴 때는 그저 전설이나 미신쯤으로 여겼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지우에게는 그 어떤 현실적인 해결책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벽에 걸린 낡은 달력을 찢어냈다. 달력 뒤에는 외조모님의 글씨로 쓰인 잊힌 메모가 있었다. 희미한 묵향이 느껴지는 한문 몇 자와 함께, 서울의 가장 낡은 동네, 허름한 뒷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 상점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외조모님은 항상 그곳을 ‘어둠의 가게’라고 부르셨다. 그곳에는 어떤 소원이라도 이루어준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 대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다고도 했다.
지우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빗물에 젖은 창문 밖으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유령과도 같았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얼굴, 깊게 파인 눈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푸석한 머리카락. 하지만 그 눈빛만은 붉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민준아.”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이름은 더 이상 사랑이나 그리움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날카로운 맹세였다.
“네가 나에게서 앗아간 모든 것을, 반드시 돌려받을 거야. 아니, 그 몇 배로 돌려줄 거야. 설령 내가 악마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지우는 메모가 적힌 종이를 품에 넣고 문을 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차가운 빗방울이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그러나 섬뜩한 결의를 담아, 어둠의 가게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복수극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