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고요한 균열
청명학원(淸明學園)은 이 세계의 정점에 서 있었다. 천 년의 역사를 품은 거대한 학원 건물은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산맥을 휘감고 솟아 있었고, 푸른 하늘을 꿰뚫는 첨탑들은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학원의 지붕 위로는 항상 맑고 청아한 기운이 감돌았으며, 저 멀리 보이는 영봉(靈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정기는 학원 전체를 감싸 안아 수련에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했다. 이곳에 입학한다는 것은 곧 깨달음과 영생의 길에 한 발짝 다가섰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그 모든 웅장함과 영광이 때로는 숨 막히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대강당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앉아, 이안은 눈을 감고 있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제각기 자신의 영력을 순환시키며 정신을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한정우 교수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강당을 울렸지만, 이안의 귀에는 그저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들릴 뿐이었다.
“영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만물의 근원이자, 우리 존재의 정수다. 허나 그 힘을 다루는 것은 단순히 기운을 끌어모으는 것을 넘어선다. 진정한 경지는….”
이안은 집중하려 애썼지만, 그의 정신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눈을 감자마자, 어둡고 축축한 지하 통로의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곰팡이 냄새, 차가운 공기, 그리고 저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듯한 알 수 없는 속삭임. 그는 최근 들어 부쩍 이런 환영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원에 들어온 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또야….’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었다. 어떤 이는 이것을 타고난 영민함이라 칭했고, 어떤 이는 불길한 저주라 속삭였다. 이안 자신은 그저 귀찮고 성가신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학원 지하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기운은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옆자리에 앉은 류진이 눈을 뜨며 그를 흘끗 보았다. 류진은 학년 수석을 놓치지 않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의 눈빛에는 늘 자부심과 함께, 이안을 향한 미묘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이안은 겉보기에 영력 운용에 늘 버벅이는 부진아였으니까.
“이안, 또 딴생각 하냐? 한 교수님 수업은 놓치면 안 되는 부분 많다. 넌 이론이라도 잘 들어야지.”
류진의 비아냥거림에 이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어, 류진.”
사실 이안은 이론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고대 영력학부터 진법, 금기된 마법에 이르기까지, 그는 책이라면 무엇이든 탐독했다. 그의 문제는 늘 ‘실천’에 있었다. 그의 영력은 미약하지 않았지만, 남들처럼 밖으로 끌어내어 형태를 만들고, 술법을 발동하는 데는 늘 어려움을 겪었다. 영력이 외부로 발현되기보다는, 그의 내부에서 맴돌며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쪽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강당을 나섰다. 이안은 그들의 활기찬 웃음소리와 밝은 표정 속에서 더더욱 이질감을 느꼈다.
“이안, 넌 항상 왜 그렇게 어두워? 햇빛 좀 보고 살아라.” 류진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정기 훈련 있잖아. 넌 늘 빠지지 않고 온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좀 나아졌기를 바란다. 지난번처럼 또 영력 통제 실패해서 훈련장 얼리면 안 된다?”
류진은 능글맞게 웃으며 다른 친구들과 함께 사라졌다. 훈련장 얼린 일은 사실 이안의 영력 폭주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지하에서 솟아난 기운이 훈련장 전체의 기운을 뒤틀었고, 이안은 그걸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방어막을 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설명은 아무도 믿지 않았고, 이안은 ‘또 영력 통제에 실패한 부진아’로 낙인찍혔다.
이안은 복도를 걸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복도 끝에 위치한 낡은 게시판에 시선이 닿았다. 학원 내에서 금지된 구역을 알리는 공지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지하 심층부 접근 금지’라는 붉은 글씨였다.
‘…지하 심층부.’
그곳은 학원의 어떤 전설보다도 오래된, 철저히 봉인된 구역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원 초창기에 내려진 강력한 봉인진이 그곳을 지키고 있으며, 안에는 끔찍한 괴물이나 금지된 고대 마법의 잔해가 잠들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곳은 청명학원이 자랑하는 빛나는 지식과 영력의 정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둠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느끼는 이 불길한 기운의 근원도 그곳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 이안을 사로잡았다.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차가운 영기는, 학원 지하에서부터 솟아올라 이안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안 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안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한정우 교수였다. 그는 평소처럼 낡은 교복과 잔뜩 구겨진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군. 수련이 제대로 되지 않는가?”
“아닙니다, 교수님.” 이안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냥… 요즘 몸이 좀 무거워서요.”
한정우 교수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어딘가 깊은 연민이 담겨 있는 듯했다.
“자네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영민한 영혼을 가졌지.” 교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것이 축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만….”
이안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능력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교수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자네의 영력이 발현되지 않는 이유가, 그 영민함 때문일 수도 있네.” 한정우 교수는 낡은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외부로 향하는 대신, 내부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마치… 거대한 틈새처럼.”
‘거대한 틈새….’ 이안은 그 말이 마음에 와 박혔다. 그는 자신이 느끼는 지하의 존재가 마치 거대한 구멍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 어떤 틈새는 너무 깊어서, 그 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빨려 들어갈 수 있으니.”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안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날씨가 차가워서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듯한, 뿌리 깊은 공포였다.
쿵. 쿵. 쿵.
아주 희미하게, 마치 심장이 고동치는 것처럼, 발밑에서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다른 학생들은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듯 평온하게 복도를 오갔지만, 이안의 예민한 감각은 학원 깊은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불길한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숨 쉬는 듯한, 살아있는 존재의 맥동이었다.
이안의 눈은 저절로 게시판의 ‘지하 심층부 접근 금지’라는 글귀로 향했다. 그 붉은 글씨가 마치 피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진동은 점차 강해졌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듯, 혹은 거대한 톱니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학원 전체를 감싸고 있던 청명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의 평온한 기운 속에 아주 미세한, 하지만 섬뜩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한정우 교수는 그런 이안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걱정과 함께, 어떤 숙명과도 같은 체념이 어렸다.
“자네의 그 감각이, 언젠가 자네를 이끌겠지.” 교수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어딘가 초라해 보였지만, 동시에 수많은 비밀을 짊어진 노학자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교수가 사라지고, 이안은 홀로 복도에 남았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다시 잠잠해졌지만, 그 여운은 이안의 마음속에 강하게 박혔다. 그는 학원 건물의 가장 깊은 곳, 모두가 잊고 살아가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었다.
모두가 숨기고, 감추고, 애써 외면하는 학원의 심장부에 숨겨진, 살아있는 재앙.
이안은 직감했다. 자신이 학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이 거대한 비밀과 뗄 수 없는 운명으로 엮여 있었음을. 그리고 언젠가, 자신은 그 고요한 균열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될 것임을.
그날 밤, 이안은 잠들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는 계속해서 어두운 지하 통로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그 환영 속에서, 무언가가 그를 부르는 듯한, 절규와도 같은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듯했다.
“…와라. 이리 와라….”
이안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옷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이 불길한 감각의 근원을, 자신이 직접 찾아보기로.
청명학원 지하에 숨겨진, 그 끔찍한 금기의 정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