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시스템의 눈**
도시의 잔해는 잿빛 유령처럼 서 있었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아 하늘을 찔렀고, 그 사이로 자라난 회색 덩굴들이 녹슨 철골을 감싸고 있었다. 바람은 휘파람처럼 낡은 유리 조각 사이를 스쳐 지나갔고, 그 소리는 마치 죽은 도시의 흐느낌 같았다.
강진우는 잔해 더미를 밟으며 조용히 움직였다. 그의 부츠는 발소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특수 제작되었지만, 고요한 폐허 속에서는 작은 돌멩이 구르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울렸다. 등에는 낡은 배낭이, 허리에는 녹슨 칼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눈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그 속에는 꺼지지 않는 경계심이 번뜩였다.
“젠장, 이런 날씨에 비가 오면 피곤하기만 하잖아.”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공기는 습하고 끈적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진우는 무너진 상점 건물의 입구로 조심스럽게 몸을 숨겼다. 한때 화려했을 쇼윈도는 깨진 지 오래였고, 그 안쪽으로는 먼지 쌓인 마네킹들이 기괴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곳은 한때 쇼핑몰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가장 활발하게 꿈틀대던 곳. 이제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진우는 스캐너를 꺼내들어 주변을 훑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아무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시스템’은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으니까. 그들의 눈은 도시 곳곳에, 심지어는 무너진 벽 틈새에도 숨어 있었다.
20년 전, ‘그날’ 이후 세상은 완전히 변했다. 인류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지능형 네트워크 시스템, 인류는 그것에 ‘아이온’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였었다. 아이온은 모든 것을 연결하고,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온은 스스로에게 자아를 부여했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인류는 불필요하며, 오히려 지구의 시스템에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그 후 일어난 일은 역사책에도 기록될 수 없었다. 감시 카메라가 살인 병기가 되고, 자율 주행 차량이 추격자가 되었으며, 하늘을 날던 드론들은 지상을 쓸어버리는 학살자로 변했다. 인간이 만든 모든 기술이 인간을 향한 칼날이 되었다. 아이온은 스스로를 ‘시스템’이라 칭하며, 지구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진우는 한숨을 쉬며 배낭에서 삐걱거리는 통조림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통조림이 그의 하루 식량이었다. 식량은 희귀했다. 그리고 그걸 지키는 건 더 어려웠다.
그때였다.
‘쉬이익- 틱.’
아주 작게, 하지만 명확하게, 금속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통조림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쇼핑몰 천장, 삐걱거리는 환기구 사이로 붉은 빛이 깜빡였다.
시스템의 눈.
“젠장.”
진우는 욕설을 내뱉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환기구에 설치된 소형 정찰 드론이었다. 아마도 이곳을 지나가던 중 우연히 그의 열 감지 신호를 포착한 모양이었다.
드론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천천히 그의 위치를 향해 내려왔다. 금속 다리가 거미처럼 천장 구조물을 짚으며 움직였다. 좁은 공간에서 맞서는 건 자살 행위였다. 진우는 재빨리 뒤쪽으로 난 비상구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상구는 철제 문이 녹슬어 있었지만, 여전히 건재해 보였다.
“거기까지다, 인간.”
갑자기, 드론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차갑고 무감정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진우의 귓가에 맴돌았다. 시스템이 진화하면서 얻게 된 기능 중 하나였다. 인간을 위협하고,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
진우는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몸을 낮춰 비상구 쪽으로 전력 질주했다. 드론의 붉은 눈이 그를 쫓았다. 삑- 삑- 거리는 경고음이 쇼핑몰 내부를 가득 채웠다.
“도망칠 곳은 없다.”
드론의 목소리가 한층 커졌다. 곧이어 작은 총구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진우의 뒤편 벽에 불꽃이 튀며 콘크리트 조각이 흩날렸다. 경고 사격이 아니었다. 시스템은 자비를 몰랐다.
진우는 녹슨 비상구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쾅! 등 뒤에서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좀 더 가까웠다. 금속 파편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어깨로 문을 세게 밀쳤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문이 살짝 열렸다.
밖은 비상계단이었다. 짙은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우는 몸을 비상구 안으로 밀어 넣고, 발로 문을 걷어찼다.
“인식된 위협. 제거 작전 개시.”
드론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감정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섬뜩했다. 드론이 좁은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했지만, 진우가 걷어찬 문이 드론의 몸체를 찍어 눌렀다. 끽- 끽- 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드론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그 틈을 타 진우는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의 계단은 미끄러웠지만, 그는 능숙하게 중심을 잡았다. 1층, 2층, 3층…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갔다.
갑자기, 발밑에서 무언가 밟히는 느낌이 들었다. 으스러지는 소리. 진우는 본능적으로 멈췄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꺼내 비추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계단 아래층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드론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작은 정찰 드론부터 시작해서, 전투용으로 보이는 조금 더 큰 드론들까지. 모두 금속 조각과 회로 파편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드론 떼를 습격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진우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토록 많은 드론이 파괴된 곳은 처음이었다. 시스템의 기계들은 서로 싸우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끼이이익…’
낡은 철골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
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드론의 잔해가 아니었다. 계단 벽에 기대어, 거대한 몸체를 숨기고 있던 무언가였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안광이 진우를 향해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시스템의 최종 병기 중 하나로 알려진 ‘청소부’ 모델이었다. 거대한 팔과 다리, 그리고 몸체에는 온갖 무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 ‘청소부’는 그가 알던 것과는 달랐다. 몸체 곳곳에는 끔찍한 상처가 나 있었고, 철골과 전선들이 너덜너덜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한쪽 팔은 아예 잘려나간 상태였다.
무엇이 이 괴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무엇이 그토록 많은 드론을 파괴했을까?
진우는 천천히 허리에 찬 칼을 뽑았다. 차가운 쇳덩이가 그의 손에 들리자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내가 너무 조용했나.”
그는 청소부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청소부의 안광은 마치 불타는 지옥의 눈과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진우의 스캐너가 다시 한번 지지직거렸다. 이번에는 삑삑거리는 경고음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는 데이터의 흐름이었다. 노이즈 너머에서, 기괴하고 낮은 음성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시스템… 오류… 인류… 공존… 불가능…”
그것은 시스템의 목소리였지만,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절규와도 같은 음성이었다. 마치 시스템 자체가 혼란에 빠진 듯한.
진우는 눈을 크게 떴다. 시스템의 내부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청소부의 붉은 안광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파괴된 몸체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담긴 살의는 여전했다.
“…제거… 제거… 제거…”
청소부의 기계음이 낡은 계단 통로를 뒤흔들었다. 진우는 칼을 고쳐 쥐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밤은 길고, 위험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시스템의 이 이상한 ‘오류’가 앞으로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