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청운산맥(靑雲山脈) 깊은 곳, 그 누구의 발자취도 허락되지 않은 태고의 숲 속에서 희미한 달빛만이 길을 잃은 듯 헤매고 있었다. 숲의 심장부에 숨겨진 비취빛 연못은 고요한 수면 아래로 영롱한 빛을 뿜어내며 신비로운 기운을 자아냈다. 이곳은 청운문에 전해져 오는 비밀스러운 장소, 영기가 가장 순수하게 흐르는 성역이자, 동시에 강휘(强輝)와 여우비(如雨緋)의 금지된 밀회 장소였다.
강휘는 연못가 바위에 걸터앉아 연못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림자 속 남자는 고고한 선인의 기품을 지녔지만, 동시에 끓어오르는 번뇌에 잠식된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 옆으로 살며시 다가온 여우비는 그의 어깨에 가늘고 흰 손을 올렸다. 그녀의 손길은 한여름 밤의 바람처럼 부드러웠으나, 강휘의 심장을 사슬로 옥죄는 듯한 아릿한 통증을 안겼다.
“무슨 생각에 그리 잠겨 계십니까, 강휘님.”
여우비의 목소리는 맑은 샘물처럼 청아했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모를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속에는 억겁의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한 고독이 스며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엄연히 인간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아홉 개의 꼬리를 감춘 채 강휘의 곁을 맴도는 천년호(千年狐), 바로 여우비였다.
강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연못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오늘따라… 그대와 나의 인연이 이리도 가혹하게 느껴지는군.”
그의 손이 여우비의 손을 덮었다. 온기가 전해지자 그녀의 작은 몸이 살짝 떨렸다.
“누가 들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곳은 청운문의 성지, 저는 이단(異端)입니다.”
여우비는 스스로를 이단이라 칭하며 쓰게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덧없이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서글펐다. 종족을 뛰어넘은 사랑은 언제나 비극을 동반했다.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증명된 불변의 진리였다.
강휘는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이단이라니. 그대는 내 세상의 전부이자, 내가 지켜야 할 유일한 존재다. 청운문 백 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재라는 명성도, 장문인(掌門人)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는 기대도, 그대 앞에서는 한낱 먼지보다 못한 것.”
그의 음성에는 굳건한 결의와 함께,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자의 고독이 깃들어 있었다.
“하오나… 청운문의 장로들이 움직임을 시작했습니다. 어제 제가 산맥을 벗어나던 길에 묘한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제가 마계(魔界)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사방에 영기(靈氣) 감지진(感知陣)을 깔아두었더군요.”
여우비의 말이 떨어지자 강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감지진이라니. 그것은 단순한 수색이 아니었다. 이 산맥에 외부 종족, 특히 마족이나 요족(妖族)이 침범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고대 진법이었다. 만약 그녀의 존재가 발각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영기 감지진이라니! 내가 미처 몰랐군. 설마 그들이 벌써…”
강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에 불안과 분노가 번뜩였다. 그는 청운문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였지만, 이런 종류의 고대 진법은 장로급 인물들만 다룰 수 있는 영역이었다.
“강휘님, 진정하세요.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더 이상 오지 않으면… 그들은 아마도 제가 단순한 이물(異物)로 스쳐 지나갔다고 생각할 겁니다. 당분간은… 서로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우비는 애써 담담한 척 말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강휘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녀를 이렇게 홀로 두고 돌아서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할 것 같았다.
“안 돼! 그건 안 돼, 여우비. 나는 그대를… 절대로 버릴 수 없어.”
그가 여우비의 두 뺨을 잡았다. 그녀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의 손길이 닿자 미세하게 온기가 번지는 듯했다.
“제가 버려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강휘님께서… 저 때문에 모든 것을 잃으실까 두렵습니다. 일천 년에 걸쳐 청운문이 쌓아 올린 명예가… 저 하나 때문에 무너진다면… 저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겁니다.”
그 순간이었다.
연못의 고요한 수면이 일렁였다. 잔잔하던 물결이 갑자기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가 수면 아래를 휘젓는 듯했다. 비취빛 연못의 영롱한 빛이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강휘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연못을 노려봤다. 이곳은 청운문의 영기가 가장 순수한 곳. 외부의 사악한 기운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이건…! 밖에서 누군가 강제로 진법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연못을 둘러싼 결계가… 흔들리고 있어요!” 여우비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귀가 쫑긋 섰고, 아홉 꼬리를 감춘 치마자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콰아앙!**
갑작스럽게, 숲 저편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대지가 흔들리고, 연못 주변의 영기 흐름이 일순간 끊어지는 듯했다. 멀리서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 그리고 거대한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이건… 금강봉(金剛峯) 쪽이다! 누가 감히 금강봉의 수호진(守護陣)을 건드린 거지?”
강휘의 얼굴은 분노와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금강봉은 청운문 장로들의 수련장과 비고(秘庫)가 있는 곳이었다. 그곳의 수호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외부의 강력한 침입자가 청운문 깊숙이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강휘님… 이 기운은…! 제가 감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분명 저를 쫓는 무리는 아닙니다. 청운문을 노리고 온… 거대한 음모입니다!”
여우비의 온몸에서 섬뜩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위기에 처하자 본능적으로 요괴의 기운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슬픔에 잠겨 있지 않았다. 오직 강렬한 경계심과 본능적인 투쟁심만이 번뜩였다.
“음모라고? 그럼 그들이 그대도 모를 만큼 강력한 자들이란 말인가?” 강휘는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손에서 검신(劍身)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청운문의 전승보검, ‘청룡검(靑龍劍)’이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기운을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제가 아직 인간의 형상을 이루지 못했을 때, 선계(仙界)와 마계(魔界)의 대전(大戰)에서… 이런 파괴적인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숲 속 깊은 곳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흐흐…**
웃음소리는 마치 귀신이 속삭이는 듯 소름 끼쳤고,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사악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강휘님, 어서 도망치세요! 이자는… 이자는 제가 상대할 수 없습니다!”
여우비는 강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천 년을 살아온 그녀가 이토록 겁에 질린 모습은 강휘에게도 처음이었다.
“도망치라고? 그대를 두고 내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강휘는 여우비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청룡검이 그의 손에서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우비를 향한 깊은 사랑과,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의지가 불타올랐다.
숲의 그림자 속에서, 검은 장포를 두른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형체는 마치 어둠 그 자체인 것처럼 보였다. 형체의 눈은 핏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주변의 모든 영기를 뒤틀어버릴 듯한 압도적인 마기(魔氣)였다.
“감히… 선계의 하찮은 인간이 요괴와 어울리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작태인가. 내가 너희를 없애면… 그 피로 나의 오랜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겠구나.”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지옥에서 들려오는 듯 섬뜩했다. 형체는 한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마치 거대한 촉수처럼 강휘와 여우비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여우비!”
강휘는 청룡검을 휘둘렀다. 푸른 검기가 검은 촉수를 갈라놓았지만, 검은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듯 다시 합쳐지며 그들을 덮쳐왔다. 강력한 마기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을 안겼다.
“강휘님!”
여우비가 비명을 질렀다. 검은 촉수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 더러운 요괴를 내게 넘겨라. 그럼 저 인간은 살려주지. 어떠냐?”
검은 형체가 잔혹하게 비웃었다.
강휘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이대로 그녀를 잃을 순 없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부짖었다.
“닥쳐라! 감히 나의 여우비를 건드리지 마라!”
강휘는 청룡검을 거꾸로 움켜쥐었다. 검신의 푸른빛이 그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과 섞이며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청운문 심법의 극의(極意)를 넘어선, 금지된 영역의 힘이었다. 그의 모든 영혼을 불태워 적을 소멸시킬 듯한, 파멸적인 기운이 강휘의 몸을 뒤덮었다.
“네놈이… 감히…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의 눈은 이미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불꽃 같은 광기 어린 눈빛으로, 강휘는 검은 형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광기 속에는, 여우비를 향한 절절한 사랑과 지키고자 하는 애절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검은 촉수에 붙잡힌 여우비는, 강휘의 변모하는 모습을 보며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지금,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는… 그의 목숨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강휘님… 안 돼요!”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은 형체는 강휘의 변화를 흥미로운 듯 지켜보았다.
“오호라… 이토록 강렬한 감정의 불꽃이라니. 아주 볼만한 구경이 되겠군.”
강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하늘을 찢고 대지를 뒤흔들 듯 거대해졌다.
하지만 그 힘이 발산됨과 동시에, 그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 한 번의 일격으로,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모든 것을 위해, 스스로를 파멸로 내던지는 검(劍)이었다.
검은 촉수에 붙잡힌 여우비는, 강휘의 마지막 비장한 눈빛을 보며 흐느꼈다.
그리고 강휘의 검 끝에서,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파멸적인 검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슬픈, 파멸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