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황무지 위에 낡고 투박한 증기 기관차가 느릿하게 기어갔다. 사람들은 이 기계를 ‘달팽이’라 불렀고,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이를 ‘진우’라 불렀다. 진우는 이 묵직한 강철 덩어리 안에서 고글과 먼지투성이 작업복 차림으로 웅크려 잠들어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기름때가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삐걱이는 침대 위로 고르지 못한 진동이 전해졌다. ‘달팽이’의 압력계는 붉은색 경고 구역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고, 보일러에서는 힘없는 증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우는 부스스 눈을 떴다. 창밖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하늘은 두터운 스모그와 재 먼지로 뒤덮여 영원한 황혼에 갇힌 듯했고,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붉은 잔광이 번질 뿐이었다.
“젠장, 또 석탄이 다 떨어졌군.”
그의 입에서 건조한 중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어제 간신히 찾아낸 녹슨 통조림을 씹으며 어렴풋한 허기를 달랬다. 식량보다 더 큰 문제는 ‘달팽이’의 연료였다. 이 강철 거북이가 멈추는 순간, 그것은 곧 진우의 생존도 끝났음을 의미했다. 굶주림은 잠시 버틸 수 있지만, 혹독한 황무지에서 이동 수단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다.
진우는 낡은 지도를 펼쳤다. 기름때와 습기로 얼룩진 지도 위에는 몇 개의 지명과 함께 붉은 X 표시가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 한가운데에 희미하게 표시된 옛 ‘제3 산업 단지’를 짚었다. 재앙 이전 시대에 거대한 증기 기관과 기계 부품들을 생산했던 곳.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에 혹시라도 쓸 만한 석탄이나 증기 부품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을 붙잡았다.
“그래, 이곳뿐이야.”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 ‘달팽이’의 조종석에 앉았다. 고글을 고쳐 쓰고 레버를 당겼다. ‘쉬이이익, 쿨럭… 텅!’ ‘달팽이’는 최후의 힘을 짜내듯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철 바퀴가 잿빛 대지를 긁어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폐허가 된 도시 외곽은 끔찍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녹슨 철골 구조물들이 뼈대처럼 하늘을 찔렀고, 깨진 유리창들은 거대한 눈동자처럼 텅 비어 있었다. 과거의 영광은 산산조각 난 채, 흙먼지 속에서 서서히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달팽이’는 낡은 건물들을 비집고 나아가며 둔탁한 엔진 소리를 토해냈다.
드디어 ‘제3 산업 단지’의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철문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그 사이로 과거의 잔해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내부는 불길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진우는 ‘재앙 이전’ 시대의 자동 방어 시스템, 일명 ‘감시자’ 드론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아직 작동하는 것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감시자’의 붉은 센서 눈을 마지막으로 본 자는 없다는 말이 돌았다.
“이곳에 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야.”
진우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희미한 증기 소리마저 잦아드는 ‘달팽이’의 압력계가 그를 재촉했다. 그는 작은 기어달린 손전등을 들고 허리에 다용도 공구 가방을 둘러맸다. 압력계와 몇 개의 예비 부품도 잊지 않았다.
“잠깐만 버텨다오, 달팽이.”
진우는 ‘달팽이’의 육중한 강철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밑에서 부서진 잔해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공장 내부는 거대한 기계의 무덤이었다. 낡은 작업대 위에는 먼지 쌓인 부품들이 널려 있었고, 끊어진 벨트와 녹슨 체인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진우는 손전등을 비추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그의 고글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차갑고 쓸쓸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그는 거대한 폐쇄된 보일러실을 발견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아직 온전한 상태의 압축 석탄 더미와 몇 개의 고품질 윤활유 통이 놓여 있었다. 그는 희열에 차서 탄성을 내뱉을 뻔했지만,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자의 본능이 그를 억눌렀다. 이곳에 이런 귀한 물건이 남아 있다는 것은, 동시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정도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겠어.”
그는 서둘러 공구 가방에서 빈 자루를 꺼내 석탄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쉬이이익’ 하는 불길한 소리가 천장의 녹슨 파이프들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진우의 몸이 순간 굳었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녹슨 철골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은 바로 ‘감시자’ 드론이었다. 두 개의 붉은 센서 눈이 진우를 향해 번뜩였다. 팔에는 압축 공기 드릴이 장착되어 있었다. 드론의 육중한 몸체에서는 희미한 증기가 새어 나왔고, 녹슨 기어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젠장, 이런 게 아직도 살아있다니!”
진우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공구 가방에서 직접 개조한 EMP 수류탄을 꺼냈다. 드론은 멈추지 않았다.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드릴이 벽을 뚫는 섬뜩한 소음이 보일러실을 가득 채웠다. 진우는 폐기된 기계 구조물 사이를 오가며 드론의 움직임을 읽었다. 드론은 빠르고 집요했다. 한 번 목표를 설정하면 놓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드론이 압축 공기를 충전하는 찰나의 순간, 붉은 센서 눈이 잠시 흐려지는 것을 진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몇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진우에게는 충분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EMP 수류탄을 드론을 향해 던졌다.
‘치지직!’
수류탄이 드론의 몸체에 부딪히며 섬광을 내뿜었다. 드론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고, 붉은 센서 눈은 꺼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우는 폐기된 강철 파이프를 집어 들고 드론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목표는 드론의 핵심 구동부에 있는 증기 파이프였다. 그곳이 곧 드론의 심장이었다.
‘콰앙!’
진우는 온 힘을 다해 파이프 렌치로 드론의 증기 파이프를 내리쳤다. 육중한 강철이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드론의 몸체에서 뜨거운 증기가 터져 나왔다. 드론은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붉은 센서 눈은 영원히 꺼졌다.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쓰러진 드론을 확인했다. 망가진 잔해 속에서 쓸만한 부품들을 빠르게 떼어냈다. 동력원 코어와 몇 개의 작동하는 기어들. 이 정도면 ‘달팽이’의 잔고장을 수리하는 데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석탄과 윤활유, 드론 부품들을 급히 자루에 담아 폐허를 빠져나왔다. 드론과의 싸움 소리를 듣고 다른 생존자나 감시자들이 몰려올 수도 있었다.
‘달팽이’로 돌아온 진우는 서둘러 보일러에 석탄을 밀어 넣었다. 압력계의 바늘이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는 드론에서 떼어낸 부품으로 고장 난 압력 조절 밸브를 교체하고, 윤활유로 낡은 기어들을 닦았다. ‘후욱, 후욱!’ 거대한 증기 소리와 함께 ‘달팽이’의 엔진이 다시금 활기차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강철 바퀴가 다시 잿빛 황무지를 가르며 나아갔다. ‘달팽이’는 둔탁하지만 끈질긴 걸음으로 지평선을 향해 움직였다. 진우는 조종석에 앉아 고글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응시했다. 여전히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끝이야.”
그의 입술에서 희미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아직 불확실했지만, 엔진의 끈질긴 맥동이 그를 이끌었다. 살아남기 위한 그의 여정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