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백련(白蓮), 복수의 화신
현천문(玄天門)의 대연회장이 떠들썩했다. 문주 흑영(黑影)의 오십 년 만의 개방 수련 성공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각 문파의 장로들과 고수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였고, 흑영은 그 중앙에서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감돌았고, 어깨에는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짊어진 듯한 위풍당당함이 서려 있었다.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대연회장 입구가 산산조각 났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고, 그 너머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검은 도포 자락이 축 늘어져 있었고, 얼굴은 깊은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자의 눈빛만은 핏빛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지간의 영기가 요동치며 사내 주변으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좌중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흑영의 미소도 싸늘하게 굳었다. 저 사내가 뿜어내는 살기(殺氣)는 마치 만년한빙(萬年寒氷) 같았고, 고통에 찌든 절규 같았다.
“무엄하다! 현천문의 잔치에 감히 난동을 부리다니!”
어떤 장로가 호통을 치며 검을 뽑아 들었으나, 사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흑영을 똑바로 노려볼 뿐이었다.
“오랜만이군, 흑영.”
사내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또렷했다. 흑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 목소리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백… 백련?”
흑영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좌중은 술렁였다. 백련이라니? 청운문의 천재 검수이자 흑영의 의형제였던 백련은 이십 년 전 봉황혈(鳳凰穴) 탐사 도중 실종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 나 백련이다. 네놈이 죽였다고 확신했던 그 백련.”
사내, 백련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닥의 돌이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졌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예전의 청운문 백련의 청아한 검강(劍罡)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습하고, 폭력적이며,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와도 같은 기운이었다.
흑영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감히 죽은 자의 이름을 사칭하여 소란을 피우다니, 가증스럽다! 어서 저자를 제압하라!”
흑영의 명령에 현천문의 고수들이 백련에게 달려들었다. 수십 명의 영기(靈氣)가 한데 뭉쳐 백련을 덮쳤다. 하지만 백련은 비웃듯 피식 웃었다.
“이게 네놈이 이십 년간 쌓아 올린 힘이더냐? 가소롭군.”
백련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검이라기보다는 어둠 자체였다. 어둠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지자, 그를 덮치던 현천문 고수들의 영기가 산산조각 났다.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마치 종잇장처럼 무력했다.
“말도 안 돼…!”
흑영의 눈이 흔들렸다. 백련의 기운은 이십 년 전보다 훨씬 강했다. 그것도 이질적인 강함이었다.
백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에 이십 년 전의 기억이 스쳤다.
***
그날, 우리는 의기투합한 형제였다.
“백련아, 드디어 봉황혈이다! 이곳에 봉황의 정수(精髓)가 잠들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생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흑영은 흥분으로 빛나는 눈으로 봉황혈의 입구를 바라봤다. 우리 청운문의 두 기재(奇才)는 수많은 난관을 뚫고 봉황혈 심층부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찬란한 빛을 내뿜는 봉황 정령석이 있었다. 영생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의 보물이었다.
“흑영아, 우리 함께 수련하여 청운문을 천하 제일의 문파로 만들자!”
나는 순진하게도 흑영에게 웃어 보였다. 그때 흑영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봉황 정령석에 손을 뻗는 순간, 흑영이 나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
“크윽… 흑영… 네가…!”
배신의 고통은 육체의 고통보다 몇 배는 더 처절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흑영의 차가운 목소리.
“미안하다, 백련. 하지만 봉황 정령석은 둘이 나눌 수 없는 보물. 너는 너무 순수하여 세상의 이치를 모른다. 나만이 이 힘을 감당할 수 있어.”
흑영은 내 단전(丹田)을 부수고 영맥(靈脈)을 끊어버렸다. 나의 온몸의 영기가 역류하며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몰려왔다. 그는 나를 봉황혈의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하하하! 잘 가라, 백련! 네 덕분에 내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나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사지가 찢겨나갈 듯한 고통 속에서도, 내 심장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남았다. 복수. 죽어서도 잊지 않을 복수.
그 절망의 심연에서, 나는 살고자 했다. 아니, 살아서 복수하고자 했다.
수백 년 전 악마와 결탁했다는 이유로 역사에서 지워진 고대 문파의 금기된 술법서가 나락 깊은 곳에 있었다. 죽은 자를 되살리고, 파괴된 영혼을 극한의 증오로 재련하는 마도(魔道)의 비술이었다. 육체를 재건하는 고통은 매일 지옥을 오가는 것과 같았고, 영혼은 증오로 뒤덮여 잿빛으로 변해갔다. 이십 년. 이십 년간 나는 오직 복수라는 한 줄기 빛에 매달려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단련했다. 이제 나는 백련이 아니었다. 복수의 화신일 뿐.
***
“흑영, 네놈은 봉황 정령석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했겠지.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네놈이 뱉은 피를 마시며 살아남았다.”
백련의 목소리에 광기가 서렸다. 흑영은 몸을 떨었다. 백련의 눈에는 이십 년 전 나락으로 떨어지던 순간의 절망과 증오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불가능하다! 단전이 파괴되고 영맥이 끊어진 몸으로 어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흑영은 자신이 휘두르던 천하패검(天下覇劍)을 뽑아 들었다. 봉황 정령석의 힘으로 재련된 그의 검은 푸른빛을 뿜어냈다.
“네놈의 무지함이 너를 죽일 것이다.”
백련은 한 발 한 발 흑영에게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 속에서 셀 수 없는 검은 촉수들이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사악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대연회장을 뒤덮었다.
“받아라! 현천파 봉황멸세진(鳳凰滅世陣)!”
흑영은 검을 휘둘러 봉황의 형상을 한 거대한 푸른 기운을 백련에게 날렸다.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위력이었다.
백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쏟아지는 봉황 기운은 검은 촉수들에 닿자마자 힘없이 흩어졌다. 마치 푸른 불꽃이 거대한 심해에 삼켜지는 듯했다.
“그게 전부인가? 네놈이 나의 등을 찌르고 얻어낸 힘이 고작 이것이란 말이더냐!”
백련의 눈에서 검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영기 공격이 아니었다. 영혼 자체를 파괴하는 마도(魔道)의 힘이었다.
“크아악!”
흑영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희미해졌고, 얼굴에는 극심한 고통이 서렸다. 그의 내면 깊숙이 박힌 영혼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었다.
“잊었는가? 우리가 봉황혈에서 나누었던 맹세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청운문을 일으키자’던 그 약속을! 네놈의 탐욕이 그 맹세를 짓밟았다!”
백련의 검은 촉수들이 흑영의 팔다리를 묶었다. 흑영은 절규하며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용서… 용서해 다오… 백련아… 내가… 내가 잘못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흑영은 비굴하게 빌었다.
“용서? 네놈이 나의 단전을 부수고, 영맥을 끊었을 때, 나를 나락으로 밀어 떨어뜨렸을 때… 네놈은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나는 이십 년간 피눈물을 흘리며 너의 피를 갈구했다!”
백련의 검은 검이 천천히 흑영의 심장을 향했다.
“이제 네놈의 영혼을 찢어 영원히 고통받게 해 주마. 나의 처절했던 고통만큼.”
“안 돼! 제발…!”
흑영의 눈은 공포로 가득했다.
백련의 검은 망설임 없이 흑영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른빛이 사그라지며 흑영의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갔다. 그는 허망한 눈으로 백련을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대연회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현천문의 문주, 흑영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백련의 등 뒤로 어둠이 스러지고, 그는 그 자리에 홀로 남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핏빛이었다. 복수는 끝났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희열도, 만족감도 없었다.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무함만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복수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파괴된 영혼, 그리고 끝없는 공허함뿐이었다.
백련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별들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그 별빛은 이십 년 전 봉황혈에서 흑영과 함께 꿈꾸던 미래처럼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대연회장을 나섰다.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고,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산산조각 난 연회장과, 복수극이 남긴 싸늘한 죽음의 기운뿐이었다. 복수는 끝났지만, 백련의 영혼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저주에 걸린 듯했다. 모든 것을 불태운 복수 끝에 남은 것은, 스스로도 증오로 물들어 버린 고독한 존재의 끝없는 방황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