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화: 녹슨 도시의 속삭임
사방은 잿빛이었다. 하늘은 늘 먹구름을 이고 있었고, 땅은 부서진 잔해와 썩어가는 철근으로 뒤덮여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눅눅하고 비릿한 공기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날카롭게 신경을 긁었다. 지후는 낡은 방독면의 필터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거대한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병원 건물이 해골처럼 솟아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였다.
“지후 씨, 이제 거의 다 왔어요.”
뒤따라오던 수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방독면 너머로도 창백해 보였다. 며칠째 제대로 된 잠도, 음식도 섭취하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우리는 보름 동안 헤매다 간신히 얻은 정보 하나에 매달려 여기까지 왔다. ‘중앙 보건소’의 마지막 생존자가 남긴 일지에는, 대규모 재난 직전 중요 의약품과 연구 샘플이 이 구역으로 옮겨졌다는 기록이 있었다. 희망의 끈. 동시에 죽음의 덫이 될 수도 있는 정보였다.
“강 팀장님은요?” 지후가 물었다.
“벌써 앞서가셨어요. 저 양반은 늘 저렇게 급하시다니까.” 수진이 피식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불안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강 팀장. 우리는 그를 신뢰했지만, 동시에 그를 경계했다. 그는 뛰어난 생존자이자 전략가였지만, 그만큼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이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인간성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 판단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때로는 그의 결정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병원의 정문은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내렸고, 그 잔해 위로 덩굴 식물들이 징그럽게 얽혀 있었다. 눅눅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내부로 들어서자 어둠이 갑자기 덮쳐왔다. 휴대용 전등을 켜자 희미한 불빛이 길게 늘어진 복도를 비췄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천장에서는 녹슨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축축한 벽면에는 검은 곰팡이가 얼룩덜룩 피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수진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녀의 손이 지후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일지에는 지하 3층 연구실이라고 했어요.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해.”
복도를 따라 걷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우리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주변을 살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침묵 속에서, 저 너머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물방울 소리만이 존재했다. 똑, 똑.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벽에 붙은 안내판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진료과’, ‘수술실’, ‘중환자실’… 그리고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연구실’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화살표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낡은 계단으로 향했다. 난간은 이미 부식되어 손으로 잡기만 해도 붉은 녹물이 묻어 나왔다.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마다 빛은 더욱 멀어지고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후는 손에 쥔 나이프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비상시에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지하 2층에 다다랐을 때,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깐.” 지후가 손을 들어 수진을 멈춰 세웠다.
수진의 얼굴이 공포로 굳어졌다. “뭐… 뭐예요?”
지후는 전등의 불빛을 껐다. 완전히 암흑 속으로 파묻히자 감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발소리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지하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강 팀장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우리가 놓친 사이에 그들이 강 팀장을 만났을 수도 있었다. 아니, 더 최악은… 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소리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아요.” 수진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낡은 의료 카트와 깨진 책상들이 널브러져 있었지만, 완벽하게 몸을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전등 불빛이 깜빡였다. 누군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엎드려!” 지후가 수진을 끌어당겨 낡은 카트 뒤로 몸을 숨겼다.
카트의 녹슨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러 명의 신발이 부서진 바닥을 밟는 소리, 웅성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젠장, 벌써 여기까지 들어왔잖아.”
“쉬쉬. 조용히 해. 다른 놈들이 들을라.”
낯선 목소리였다. 그들은 우리처럼 생존자들일까? 아니면 약탈자들일까?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생존자와 약탈자의 경계는 모호했다.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에 쥔 나이프의 손잡이가 축축했다. 수진은 지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발소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안도감이 밀려오는 순간, 지후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발소리가 사라진 방향에서, 다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찾아 헤매는 듯, 주위를 탐색하며 다가오는 소리였다.
지후는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까 지나갔던 무리 중 한 명이 뒤에 남은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존재?
낡은 카트의 틈새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전등을 든 누군가가 카트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불빛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카트의 코앞에 멈춰 섰다.
지후는 눈을 감았다. 아니, 정확히는 감은 척했다. 최대한 숨소리마저 죽였다.
카트 너머에서 묵직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바꼭질은 이제 그만하지.”
숨을 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카트 그림자 너머로, 섬뜩하게 번뜩이는 두 눈동자가 보였다.
그것은 강 팀장의 눈동자였다.
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낡은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를 알고 찾아온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은 지후와 수진을 번갈아 훑더니, 마지막에 수진의 방독면을 벗은 목덜미를 응시했다.
“아직 쓸 만한데.”
차가운 속삭임이 어둠을 갈랐다.
지후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강 팀장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 *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