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고요한 균열
탁, 탁. 사각, 사각.
고요한 아침 공기를 가르는 건 오로지 내 손끝에서 맴도는 연필과 스케치북이 마찰하는 소리뿐이었다. 서울 하늘 아래 빼곡히 들어선 회색빛 빌딩 숲, 그중에서도 꽤 높은 곳에 자리한 내 작은 아파트는 늘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저마다의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의 미미한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곳은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 평화로웠다.
미나, 서른을 바라보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내 삶은 규칙적이고 단조로웠다. 아침 7시, 알람 대신 스며드는 햇살에 눈을 뜨고, 따뜻한 드립 커피 한 잔을 내린 뒤, 작업실 겸 거실 한 켠에 놓인 이젤 앞에 앉는 것. 그리고 세상의 모든 복잡한 것들을 잊은 채 오롯이 그림에만 몰두하는 것. 그게 내 일상이었다.
“음, 여기 그림자가 좀 더 강렬해야 할 텐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연필을 고쳐 잡았다. 시안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아 요즘은 쉬지 않고 작업에 매달리는 중이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화면 속 캐릭터의 표정이 마음에 들게 표현될 때마다 느껴지는 뿌듯함에 피곤도 잊었다.
문득, 연필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분명히, 분명히. 조금 전까지 사용하던 지우개는 연필꽂이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뭉툭한 고무 지우개는 항상 제자리를 지키는 성실한 도구였다. 그런데 지금은? 책상 한복판, 내가 스케치북을 펼쳐 둔 바로 옆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라? 내가 언제 이걸 여기다 옮겼지?”
피곤해서 깜빡했나? 어젯밤까지 작업하다가 무의식중에 옮겨두고 잊었을 수도 있다. 고개를 갸웃하며 지우개를 집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별일 아니었다. 그저 피로가 빚어낸 착각이겠거니. 나는 다시 그림에 집중했다.
점심시간, 간단히 냉장고에서 남은 반찬을 꺼내 식탁에 앉았다. 갓 지은 밥과 김치찌개는 소박하지만 든든한 한 끼였다. 숟가락을 들려는데, 문득 눈길이 주방 쪽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이 살짝,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뭐지? 내가 또?”
이번에도 깜빡한 건가. 닫혀있던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릴 리는 없을 테고.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꾹 닫았다. 쾅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밥을 뜨려는데, 싱크대 근처 선반에 놓여있던 유리컵 하나가 ‘딸그락’ 소리를 내며 작게 흔들렸다. 찰랑, 찰랑. 빈 컵의 가벼운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파고들었다.
“흠? 지진인가?”
가끔 도심에서도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저 아래로 보이는 도시는 평소와 다름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무도 지진을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컵을 바라보니, 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제자리에 있었다.
별것 아닌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자, 묘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하지만 이내 밥을 먹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밤샘 작업 후유증이겠지.’
밤이 깊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 풍경은 낮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도시의 불빛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멀리 한강 다리의 조명은 은은하게 빛났다. 작업을 마무리하고 샤워를 한 뒤, 거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하루 종일 연필과 씨름하느라 굳어진 어깨를 주무르며, 편안하게 쉬고 싶었다.
핸드폰으로 재미있는 영상이라도 볼까 하고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거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으로 향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어린 시절부터 모아온 동화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곳.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한 권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스무 번도 넘게 읽었을 오래된 동화책.
스르륵.
갑자기, 그 책이 책장 틈에서 천천히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밀어내는 것처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나는 넋을 잃고 지켜봤다. 책은 천천히 기울어지다가, 이내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흐읍!”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쿵, 하고 발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손발이 덜덜 떨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공포에 질려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책 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떨어진 책은 표지가 위로 오게 펼쳐져 있었다.
허리를 숙여 책을 주우려는 순간, 또다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탁자 위, 내가 작업할 때 쓰는 각종 펜들이 짤랑, 짤랑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 펜들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펜 하나가 탁자 위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다른 펜들을 건드려 ‘짤랑’ 소리를 냈다.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가까스로 참아냈다. 대신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는 공포를 억지로 삼키고 뒤로 주춤거렸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까 봐 입을 틀어막았다.
텅 빈 거실.
아무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펜들은 얼마간 혼자 춤을 추다가, 이내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고요. 다시 찾아온 고요함이 이번에는 더 섬뜩했다.
‘이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야.’
‘이건… 대체 뭐야?’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묘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대체 무엇이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걸까?
나는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 동화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 한 아이가 창밖을 내다보며 친구를 기다리는 그림이 있는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림 속 아이의 표정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그림을 가만히 응시하는데, 문득 섬뜩했던 공포감 대신 다른 감정이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마… 혼자 외로워서 이런 장난을 치는 건가?’
혼자 사는 아파트에서, 그것도 이렇게 외딴 고층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이 혹시 이런 식일까?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지만, 잠은 끝내 오지 않았다. 책상 한구석에 놓인 동화책의 펼쳐진 페이지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다음 날 아침, 창밖으로 여명의 빛이 스며들었다.
간밤의 공포는 희미해졌지만, 대신 온몸에 뼈마디가 쑤시는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잠에서 깨자마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을 둘러봤다. 어젯밤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펜들은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책은 내가 주워 다시 책장에 꽂아 두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말 내가 피곤해서 환각을 본 건가?’
고개를 젓는데, 문득 현관문 아래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걸어가는 발걸음이 망설여졌다. 혹시 또 다른 ‘무언가’의 장난일까 봐. 조심스럽게 현관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아래에는 아주 작은, 연한 빛깔의 꽃잎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투명한 듯하면서도 영롱한 색을 띠는, 마치 꿈속에서 본 듯한 신비로운 꽃잎이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이곳에 두었을까?
나는 멍하니 꽃잎을 응시했다.
‘이건 또 뭐야…?’
어제까지의 평화로운 일상에, 알 수 없는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