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빛 빌딩 숲은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지훈은 낡은 아파트 12층 창밖을 내려다보며 매일 똑같은 풍경을 응시했다. 무너져 내린 도로, 앙상한 철골을 드러낸 건물 잔해들, 그리고 어디에도 살아있는 기척 없는 고요. 재앙 이후, 이 회색빛 풍경은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되었다. 그의 아파트는 어쩌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성역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버텨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성역마저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은 사소했다. 부엌 선반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깡통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쥐새끼가 또….”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며 깡통을 주워 올렸다. 쥐가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애써 그렇게 믿었다. 고립된 삶 속에서 생기는 불안은 늘 합리적인 설명을 갈구했다.

며칠 뒤,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낡은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번엔 깡통처럼 소리 내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것처럼, 아무 소리 없이, 그저 그렇게 놓여 있었다. 지훈은 책을 다시 올려놓으며 헛기침했다.
“잠결에 내가 건드렸나….”

밤이 되자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시작되었다. 벽을 긁는 듯한 ‘스륵, 스륵’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희미한 속삭임. 지훈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귀를 막았다. 공포는 이 작은 소리들을 증폭시켜 그의 신경을 잠식했다. 이 아파트에 혼자라는 사실이 비로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순간이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깬 지훈은 소리쳤다. 방문이 스르륵 열려 있었다. 분명히 잠그고 잤었는데. 그는 벌떡 일어나 방문을 닫고 쇠사슬까지 걸었다. 하지만 다시 침대에 눕자마자, 방문이 ‘딸깍’ 소리를 내며 다시 열리는 것을 목격했다. 쇠사슬이 걸려 있는데도.

그때부터는 대놓고 지훈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어제 분명히 식탁 위에 놓아둔 손전등이 욕실 세면대 위에 올라가 있었다. 간신히 아껴쓰던 물컵은 어느새 깨져 싱크대에 버려져 있었다. 가장 아끼던 어머니의 사진은 액자에서 빠져 거실 바닥에 엎어진 채 발견되었다.

“대체… 뭐야, 너…!”
지훈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몽둥이를 들고 집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창고, 작은방, 심지어 환풍구까지. 아무도 없었다. 완벽하게 고립된 이 아파트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벽에 적힌 글씨를 발견한 건 그날 저녁이었다. 부엌 벽에 오래된 먼지가 손가락으로 긁힌 듯 ‘혼자’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거야…!”
그는 필사적으로 글씨를 지웠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보니 글씨는 다시 그 자리에, 더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이번엔 ‘혼자 두지 마’였다.

두려움은 점점 편집증으로 변해갔다. 지훈은 밤새 불을 켜놓고 잤고, 문이란 문은 모두 자물쇠로 잠갔다. 문틈에 작은 종이 조각을 끼워 넣어 혹시라도 열리면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종이는 아침마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이 아파트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혹은… 자신이 갇혀 있는 것이거나.

가장 끔찍했던 밤은, 정전이 된 날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지훈은 벽에 기대어 몸을 웅크렸다. 휴대용 라디오에서 지직거리는 잡음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그때, 거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무거운 것이 바닥에 떨어진 소리였다.
“누구… 누구세요…?”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거실 바닥을 긁는 듯한 ‘스륵, 스륵’ 소리. 무언가가 느릿하게, 지훈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겨우 휴대폰 손전등을 켰다. 희미한 불빛이 거실 바닥을 비추자,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냉장고 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 있던 식료품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식료품들 사이로, 누군가 손가락으로 그린 듯한 그림이 보였다.
사람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기괴하게 비틀린 팔다리, 그리고 텅 비어 있는 눈구멍. 그것은 마치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꺄악!”
지훈은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눈앞에서 의자가 휙 하고 날아와 벽에 부딪혔다. 산산조각 난 의자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제발… 제발 사라져 줘…!”
지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부짖었다. 등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 것 같은 감각.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가지 마… 혼자… 두지 마….”
희미하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절박한 목소리. 동시에, 그에게서 모든 희망을 빼앗아가는 듯한 절망적인 음성이었다.
지훈은 정신없이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차라리 바깥의 무너진 세상이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리 손잡이를 돌리고 발로 차도 꼼짝하지 않았다.

“안 돼! 열려! 제발…!”
그때, 현관문 너머 복도 끝에서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 빛은, 마치 무언가를 집어삼킬 듯 강렬해졌다. 지훈은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빛은 점차 그를 감쌌다. 차가운 손길은 이제 온몸을 휘감고, 귓가에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혼자 두지 마… 혼자 두지 마….”

빛 속에서, 지훈은 천천히 몸을 떨었다.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했지만,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체념이 비쳤다. 이 성역은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재앙 속에서 그를 기다리던 것은 파괴된 세상이 아니라, 이 차가운 아파트 안의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성역은, 가장 끔찍한 감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