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망각의 심연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끈적한 어둠은 횃불의 희미한 불꽃마저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카이젤은 낡은 가죽 장갑을 낀 손에 횃불을 쥔 채 좁고 구불거리는 통로를 걸었다. 그의 발소리만이 고요한 지하 미궁에 희미한 메아리를 남겼다. 수백, 아니 수천 년 동안 인적이 끊겼을 이 망각의 지하 유적은 죽은 듯 침묵하고 있었다.

“셀레나, 얼마나 더 가야 해?”

카이젤의 나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그의 등 뒤에서는 고대 문양으로 수놓인 로브를 걸친 셀레나가 고개를 숙여 손에 든 양피지 지도를 살폈다. 낡은 지도 위로 그녀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은은한 마력이 깃든 지도는 주변의 미세한 마나 흐름을 감지하며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지도상의 예측으로는… 이 통로 끝에 중앙 홀로 통하는 입구가 있을 겁니다. 다만… 봉인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셀레나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는 이 탐사의 두뇌였고, 이 유적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녀의 머리에서 나왔다.

“봉인? 역시 그랬나. 이딴 곳이 그렇게 쉽게 열릴 리 없지.”

카이젤은 투덜거리며 횃불을 좀 더 높이 들었다. 낡은 통로의 벽면은 축축한 이끼와 알 수 없는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덩굴 틈새로 언뜻언뜻 보이는 고대 문명 특유의 기하학적인 문양들은, 한때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위용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사라졌는지, 왜 이 거대한 지하 도시가 잊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 뒤를 따르던 거구의 전사 락은 말없이 자신의 어깨에 멘 거대한 양손 도끼의 날을 만져보았다. 묵직한 강철의 기운이 어둠 속에서 낮게 울리는 듯했다. 그는 말이 적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언제나 든든했다. 어떤 위협이 나타나든 그가 앞장서서 막아낼 것이라는 굳건한 신뢰가 세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통로는 갑자기 넓어졌고, 그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강철 문이 나타났다. 육중한 강철 문은 벽면과 동일한 고대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고, 중앙에는 섬뜩하리만큼 정교한 거대한 눈동자 형상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보석은 희미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문 전체에 싸늘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다.

“찾았군.” 카이젤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게… 중앙 홀의 입구로군요.” 셀레나가 문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보석에 닿자, 푸른빛이 일렁이며 문 전체를 뒤덮는 마법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고대 문자의 흐름이 마치 살아있는 강물처럼 문 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어때? 열 수 있겠어?” 락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도끼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크게 울렸다.

“글쎄요… 이건 단순한 봉인이 아닙니다. 강력한 마법적인 장벽과 함께, 일종의… 시험이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셀레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는 양피지 지도를 다시 펼쳐보았지만, 지도에는 이 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었다.

“시험이라… 뭘 원하는 거지?” 카이젤이 문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벽면의 문양들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의미심장한 상징들임을 알아차렸다. 그중 일부는 사라진 고대 종족의 신화를 묘사하는 듯했다. 거대한 존재들이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흔드는 모습, 그리고 그 앞에서 무릎 꿇은 작은 인간 형상들.

셀레나가 문에 새겨진 고대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 문은 ‘진실을 아는 자’에게만 열리리라. ‘망각에 갇힌 자’의 이름과, ‘그림자에 삼켜진 자’의 염원을 알지 못하면,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리라…”

그녀의 목소리가 통로 끝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카이젤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망각에 갇힌 자’, ‘그림자에 삼켜진 자’. 단어가 던지는 섬뜩한 뉘앙스가 신경을 긁었다.

“이건 그냥 수수께끼가 아니야.” 카이젤이 말했다. “이 유적을 지은 자들은 우리에게 뭔가 경고하려는 것 같아. 혹은… 자신들의 역사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바라는 것일 수도 있고.”

“유적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지하 도시가 한때 번성했던 ‘아르테미스 문명’의 심장부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뿐입니다.” 셀레나가 덧붙였다. “마법적인 재앙, 혹은 내부적인 분열… 여러 가설이 있지만,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역사 자체가 지워진 듯이.”

“어쨌든, 저걸 열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거군.” 락이 답답한 듯 도끼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앙! 하는 둔탁한 소리가 지하 유적을 흔들었다.

“안 돼, 락! 무리하게 힘을 쓰면 봉인이 폭주할 수도 있어! 이 문에 걸린 마법은 평범한 것이 아니야.” 셀레나가 재빨리 그를 제지했다.

카이젤은 문에 박힌 푸른 보석을 응시했다. 차가운 마력이 흘러나오는 그 보석의 깊은 곳에서, 어딘가 슬프고도 절망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문양들을 따라 만져보았다. 거친 표면 아래 숨겨진 고대 문명의 절규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셀레나, ‘망각에 갇힌 자’와 ‘그림자에 삼켜진 자’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어?”

셀레나는 양피지 지도를 다시 살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법 주머니에서 작은 금속 조각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각은 낡았지만, 그 표면에는 희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저희가 유적 초입에서 발견했던 조각입니다. 당시엔 단순한 파편인 줄 알았지만…” 셀레나가 조각을 문에 가까이 대자, 문에 박힌 보석의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일렁였다. 금속 조각의 문양과 문의 문양이 공명하는 듯했다.

“이 조각에 새겨진 것은 고대 아르테미스 문명의 통치자 계급을 상징하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적힌 이름은 ‘엘리시아’. 아르테미스 문명의 마지막 여왕의 이름입니다.”

“엘리시아… 그럼 이 여왕이 ‘망각에 갇힌 자’인가?” 카이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는 문명이 사라질 때까지 왕좌를 지켰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녀의 최후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지워진 것처럼… 망각 속에 가두어진 것이겠죠.”

셀레나는 조심스럽게 금속 조각을 문의 푸른 보석에 가져다 대었다. 접촉하는 순간, 보석의 푸른빛이 순식간에 사그라들더니, 붉은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에 새겨진 문자들이 격렬하게 빛나며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그림자에 삼켜진 자의 염원을 고하라.*

“젠장, 하나를 풀었더니 또 다른 게 나오는군.” 락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림자에 삼켜진 자… 그건 대체 누구지?” 카이젤의 시선이 다시 문 위를 헤매었다. 벽화 속에서 거대한 존재들에게 무릎 꿇은 작은 인간 형상들. 그들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이곳은 아르테미스 문명이 멸망하기 직전, 최후의 순간에 만들어진 피난처이자 봉인처라고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그림자에 삼켜진 자’는… 그들을 멸망시킨 존재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셀레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은… 그들의 멸망을 야기한 내부의 어둠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카이젤의 눈에 번뜩이는 무언가가 스쳤다. 그는 벽화 속 거대한 존재들 중 유독 섬뜩한 형상 하나를 가리켰다. 거대한 촉수를 가진, 마치 어둠 그 자체로 이루어진 듯한 형상. 그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의 손에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 듯한 동작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의 염원… 그들의 절규인가.” 카이젤은 손을 들어 문에 새겨진 마지막 구절을 어루만졌다. ‘그림자에 삼켜진 자의 염원’. 멸망에 직면한 이들이 무엇을 바랐을까?

그때, 셀레나가 희미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눈은 문에 새겨진 붉은 빛의 문구, 그리고 그 주변으로 번져나가는 기이한 검은 그림자를 향해 있었다.

“카이젤… 저것을 보십시오. 문양이… 살아 움직입니다.”

카이젤은 그녀의 말에 시선을 던졌다. 붉은 문구가 새겨진 문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며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문의 표면을 기어 다니며 새로운 형상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절규하는 얼굴들, 공포에 질린 눈들, 그리고 무언가를 간절히 외치는 입술들.

“이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군.” 카이젤의 목소리에 일말의 경외감이 섞였다. “그림자에 삼켜진 자들의… 염원이 아니라, 그들이 ‘그림자에 삼켜지는’ 순간의 절규가 새겨져 있는 거야.”

그 순간, 락이 갑자기 도끼를 고쳐 쥐며 자세를 낮췄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통로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곳을 향해 있었다.

“무언가 온다.”

낮게 깔린 락의 경고에 카이젤과 셀레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리지만 꾸준하게 다가오는 발소리. 그리고 이내, 어둠의 장막이 걷히며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온몸이 기괴한 갑옷으로 뒤덮여 있었다. 갑옷의 틈새로는 섬뜩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고, 손에는 고대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검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그 존재의 얼굴이었다. 투구 속 깊은 어둠 속에서, 오직 두 개의 붉은 눈동자만이 타오르며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수호자…!” 셀레나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이런, 우리가 봉인된 문을 너무 시끄럽게 다룬 모양이군.” 카이젤은 피식 웃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전투 태세에 돌입한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들었다.

락은 거대한 도끼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도끼날이 푸른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놈이… ‘그림자에 삼켜진 자’의 염원을 지키는 건가?” 카이젤이 이를 악물었다.

수호자는 아무 말 없이 검을 휘둘러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고대 지하 유적의 심장부에서, 잊혀진 문명의 마지막 절규를 지키려는 존재와, 그 비밀을 파헤치려는 침입자들 간의 치열한 전투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문에 새겨진 붉은 빛의 절규는 더욱 격렬하게 타올랐다. 이 거대한 지하 미궁은, 아직 그들에게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오직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이 알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