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내렸다. 아니, 쏟아졌다. 잿빛 하늘은 찢어진 먹구름 조각들을 토해내듯 지독한 장대비를 뿌려댔고, 그 아래 도시는 거대한 수채화처럼 희뿌옇게 번져 있었다. 굵고 시끄러운 빗방울들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어떤 거대한 짐승이 발톱으로 긁어대는 듯 불쾌한 진동을 안겨주었다. 서재현은 그런 창밖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의 손에는 갓 내린 뜨거운 커피잔이 들려 있었지만, 그에게서 온기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런 날씨에… 아주 귀찮게 됐습니다.”
잔잔한 그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초조하게 발을 떨던 박 경감은 그 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서 박사님. 저도 이런 식으로 찾아뵙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이건 아무래도 서 박사님밖에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박 경감의 얼굴은 피로와 함께 미심쩍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꽤나 경험이 많은 베테랑 형사였지만, 이번 사건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듯 보였다.
서재현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박 경감을 향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세상만사를 초월한 듯한 깊이를 담고 있었다. 빗소리에 묻힐 듯 작게 시작된 그의 질문은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밀실 살인, 맞습니까?”
박 경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오직 불안한 표정과 긴장된 몸짓만이 그를 대변했을 뿐이었다.
“네, 네! 맞습니다. 서 박사님은 역시… 어떻게 아셨습니까?”
서재현은 대답 대신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쌉쌀한 향이 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을 만들었다.
“당신은 어지간한 사건에는 이렇게까지 떨지 않소. 그리고 당신이 나를 찾는 사건의 십중팔구는 언제나 상식을 벗어난 범주에 속하니까. 밀실, 혹은 기괴한 살인. 안 그렇소?”
박 경감은 더듬더듬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십니다. 피해자는 강태산 씨입니다. 어둠의 경매를 통해 고대 유물들을 수집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아니, 유명한 분이시죠.”
서재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강태산. 그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희귀한 물건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기이한 소문들로 가득 찬 남자.
“시신은 그의 서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내부에서 굳게 잠긴 서재였고, 창문은 특수 강화유리로 되어 있어 외부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천장도 마찬가지고요. 환기구조차 성인 남자가 드나들기엔 턱없이 작습니다. 게다가 강태산 씨는 지독한 은둔형 인간이라 저택에는 단 한 명의 집사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집사도 살인 당시에는 외출 중이었다고 진술했고요.”
“범행 도구는?” 서재현이 물었다.
“없습니다. 그 흔한 칼 한 자루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시신에는 어떤 외상도 없었고요. 다만… 표정이… 죽는 순간 극심한 공포에 질린 듯했습니다.”
박 경감은 말을 잇기 힘든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살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독극물 검사에서도 아무런 흔적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재 내부의 모든 공기 샘플까지 채취했지만, 이상은 없었습니다. 부검의 소견은… 심장마비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서재현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이 테이블에 부딪히며 ‘탁’ 하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렸다.
“밀실 안에서, 범행 도구도 없이, 외상도 없이, 독극물도 없이, 스스로 공포에 질려 심장마비로 죽었다라… 재미있군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얇은 코트를 걸쳤다.
“안내해주시죠. 어둠의 컬렉터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
강태산의 저택은 시 외곽, 인적이 드문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돌담이 저택을 둘러싸고 있었고, 낡은 철문은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채 굳게 닫혀 있었다. 빗물에 젖어 어둡게 빛나는 검은 석조 건물은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웅크리고 있는 듯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서 박사님.” 박 경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찰차가 저택 입구에 멈춰 서자, 거친 빗줄기 속에서도 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노란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고, 그 안에는 감식반원들이 오가는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서재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눅눅하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 그는 무언가 다른 냄새를 맡았다. 흙냄새, 젖은 나뭇잎 냄새, 그리고… 희미한 비린내 같은 것. 아니, 그것보다는 훨씬 더 오래되고 끔찍한, 형언할 수 없는 냄새였다.
“이 냄새는 대체…” 서재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박 경감은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런 냄새도 안 나는데요?”
서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냄새의 근원을 찾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택의 정원에는 기이하게 뒤틀린 고목들이 서 있었고, 그 가지들은 앙상한 손가락처럼 빗줄기 속에서 하늘을 할퀴는 듯했다. 어딘가에서, 그는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속에서 울리는 듯한 저음의 웅얼거림을 들은 것 같았다. 착각일까?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빗물에 젖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박 경감이 재촉했다.
서재현은 묵묵히 그를 따랐다. 저택 내부는 외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천장은 높고, 어두운 목재 패널로 장식된 벽은 웅장하면서도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복도 곳곳에는 강태산이 수집했을 법한 이국적인 조각상과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몇몇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일그러지고 기형적인 모습이 심장을 불쾌하게 긁는 듯했다.
“서재는 이쪽입니다.”
박 경감이 안내한 곳은 저택의 가장 안쪽,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곳에 위치한 방이었다. 두껍고 육중한 참나무 문 앞에는 이미 감식반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재입니다. 발견 당시에는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고, 유일하게 열쇠를 가지고 있던 집사는 외출 중이었습니다.”
서재현은 문을 훑어보았다. 낡고 오래된 문이었지만, 잠금장치는 튼튼하고 복잡해 보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 문틈과 손잡이, 잠금장치 주변을 꼼꼼히 비춰보았다.
“틈새를 통한 침입 흔적은 없군요. 강제로 열린 흔적도 없고.”
“네, 전문가의 말로는 완벽한 밀실이라고 합니다.”
서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는 넓고 어두웠다. 낡은 서가에는 두꺼운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는데, 그중에는 제목조차 알 수 없는 고문서들이 상당수 보였다. 희미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묵직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중앙에는 거대한 서재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뒤편으로는 창문이 있었다. 창문은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감식반원들이 일부를 걷어내어 외부의 빗줄기가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재 책상 앞, 앤티크 의자 위에 강태산의 시신이 앉아 있었다.
“흐읍…”
서재현은 시신을 보자마자 아주 짧은 순간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에 비친 강태산은 박 경감의 말대로 극심한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눈은 동그랗게 치켜떠져 있었고, 입은 벌어져 마치 비명을 지르다 굳은 듯했다. 피부는 창백했고, 손은 의자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비틀려 있었다.
하지만 서재현의 시선은 표정보다 더 깊은 곳에 머물렀다. 그의 눈은 강태산의 손에 들린 것에 고정되었다. 쭈글쭈글하게 쥐어진 손에는 검은색, 낡고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작은 돌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돌 조각은 손때가 묻어 반질거렸고, 육안으로 보아도 그저 평범한 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유물입니까?” 서재현이 물었다.
“네, 강태산 씨의 수집품 중 하나인 것으로 보입니다. 시신 발견 당시부터 저렇게 쥐고 있었습니다.” 박 경감이 답했다.
서재현은 시신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허리를 숙여 강태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공포. 그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감정 중 하나였고, 그의 얼굴에는 그 감정의 모든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본’ 것에 대한 공포 같았다.
“시신 주변에서 발견된 다른 특이점은 없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책상 위에도 평소 그가 읽던 고문서 몇 권과 필기도구 정도뿐입니다. 다른 어지럽혀진 흔적도 없고요. 저항의 흔적도 전혀 없습니다.”
서재현은 서서히 서재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책장, 바닥, 천장, 그리고 다시 창문으로 향했다. 그는 서재 곳곳에 놓인 강태산의 다른 수집품들을 눈여겨보았다.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새겨진 듯한 토기, 동남아시아의 어느 부족에서나 만들 법한 나무 가면, 그리고 기하학적인 무늬가 뒤얽힌 청동 거울. 모든 것들이 묘한 불쾌감을 자아냈다.
그의 발걸음은 멈췄다. 책상 옆, 벽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였다. 칙칙한 색깔의 천에는 알 수 없는 문자와 형체가 복잡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것은 어느 고대의 신화에 나올 법한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촉수, 거대한 눈, 그리고 비늘 달린 몸통. 불쾌하고, 역겹고, 동시에 묘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형태였다.
서재현은 그 그림을 응시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책상 위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강태산의 손에 쥐어진 검은 돌 조각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강태산 씨의 서재에서, 혹시 최근에 사라진 물건이 있습니까?”
박 경감은 고개를 저었다. “집사에게 확인해봤지만, 특별히 사라진 물건은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워낙 많은 유물이 있다 보니 하나하나 파악하진 못하지만, 최소한 그가 아끼던 주요 컬렉션은 그대로라는군요.”
“그렇군요.”
서재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태피스트리와 돌 조각, 그리고 강태산의 시신 사이를 오갔다. 좁혀지는 시야 속에서, 그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찾으려 애쓰는 듯했다.
“서 박사님, 범인이 대체 어떻게 밀실 안으로 들어와 강태산 씨를 살해하고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범행 도구도 없이… 설마 유령이라도 되는 겁니까?”
박 경감의 목소리에는 이제 노골적인 공포가 섞여 있었다. 그는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눈앞의 상황은 그의 모든 상식을 부정하고 있었다.
서재현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서재 안에는 빗소리와 감식반원들의 작은 움직임, 그리고 그의 차분한 숨소리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유령은 아니오.”
박 경감이 안도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범인은 강태산 씨를 죽인 방법은 상식적이지 않소.”
그는 서서히 강태산의 시신이 앉아있던 의자의 등받이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뒤편, 벽과 의자 사이에 아주 미세하게 비집고 들어간 틈새에 시선을 고정했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좁은 틈이었다. 그는 손전등을 비추어 그곳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곳에… 작은 흠집이 있군요.”
“흠집이요?” 박 경감이 의아하게 물었다.
“아주 미세한. 마치 무언가가 벽을 스치듯 긁어낸 흔적처럼.”
서재현은 그 흠집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의 눈은 천장 모서리, 그리고 그 너머의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밀실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소.”
박 경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럴 리가요! 모든 곳을 확인했습니다!”
“아니오. 완벽한 밀실처럼 ‘보였을’ 뿐이오.”
서재현은 다시 한번 강태산의 손에 쥐어진 검은 돌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그 돌 조각이 그에게 어떤 비밀을 속삭이는 것처럼, 그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이 모든 것은… 이 방에 있는 ‘그것’이 만들어낸 완벽한 착각이었을 뿐.”
그의 말은 빗소리에 묻히는 듯했지만, 박 경감의 귀에는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서재현의 시선은 이제 강태산의 시신과, 그의 손에 쥐인 돌 조각, 그리고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넘어… 이 방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한 묘한 기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이 밀실이 숨기고 있는 ‘진짜’ 범인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이 사건은… 단순히 트릭을 깨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겠군요. 이 방 안에는… 아주 오래된 손님 한 분이 더 계신 것 같으니.”
서재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수수께끼를 풀 기회를 얻은 탐정의 만족감처럼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거대한 미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의 싸늘한 감격처럼 보이기도 했다.
밀실은 그 침묵 속에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그 안에 잠들어 있던 고대의 존재처럼,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세상의 모든 상식을 조롱하려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