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된 시간의 파편
**1화. 심연의 부름**
칠흑 같은 심연. 그곳은 모든 소리가 질식하고, 모든 빛이 삼켜지는 무(無)의 공간이었다. 인류의 항해는 이제 막 그 미약한 돛을 펼치기 시작한 아기의 첫걸음과 같았지만, ‘카시오페아 호’는 그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미지의 영역을 유영하고 있었다. 함선 내부는 쾌적한 백색광과 낮은 기계음으로 가득했지만, 창밖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공포스러운 어둠뿐이었다.
항해사 류승민은 메인 콘솔 앞, 익숙한 자세로 홀로그램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정례 브리핑, 예상 범위 내의 미약한 전자기 교란, 그리고 별것 아닌 소행성군의 데이터. 언제나처럼 지루한 임무가 계속될 터였다. 그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가볍게 패널을 훑었다.
“이상 없음. 표준 항로 유지.”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게 공기를 갈랐다.
그때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스크린 위, 아주 미세한 선 하나가 깜빡였다. 처음엔 그저 노이즈라고 생각했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는 예기치 않은 오류가 종종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선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류승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스크린을 확대하고, 다시 데이터 재검색을 명령했다.
삐빅- 삐비빅-
경고음이 울렸다. 작고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이 고요한 심연 속에서는 마치 굉음처럼 들렸다. 류승민의 몸에 순간적인 긴장감이 흘렀다. 센서가 잡아낸 것은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다. 거대한,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무언가가 카시오페아 호의 탐지 범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캡틴, 이상 신호 감지.” 그의 목소리에 나른함이 사라지고, 날카로운 직감이 묻어났다. “수치가… 이상합니다.”
캡틴 이지안은 호출을 받자마자 함교로 들어섰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힘이 있었지만, 류승민의 눈빛에서 읽어낸 비상함에 그녀의 표정도 굳어졌다. 뒤이어 부함장 박선우와 탐사대장 김현민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박선우는 말없이 류승민의 콘솔 화면을 응시했고, 김현민의 눈에는 이미 과학자 특유의 호기심이 가득했다.
“자세히 보고해, 류 항해사.” 이지안 캡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네. 초장거리 탐지 센서가… 약 10만 킬로미터 전방에서 대규모의 질량체를 감지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질량체가 방출하는 에너지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흡사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에너지를 삼키는 듯한 특이한 패턴을 보입니다.” 류승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겁니다. 기존에 알려진 어떤 천체와도 다른 형태의 데이터입니다.”
그가 스크린에 띄운 3D 모델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거대한 질량체는 끊임없이 형상을 왜곡하는 것처럼 보였다. 육면체였다가, 오각형이 되고, 다시 한순간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렸다.
“이게 뭔가? 센서 오류인가?” 박선우 부함장이 냉철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모든 센서 어레이가 동일한 정보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이 데이터를 하나의 ‘물체’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자꾸만 ‘인식 불가’ 에러를 뿜어냅니다.” 류승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인식 불가라고?” 김현민이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건 처음이야! 우리가 드디어 미지의 존재를 발견한 건가?” 그의 눈은 이미 번뜩이고 있었다.
이지안 캡틴은 잠시 침묵했다. 미지의 존재. 그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자, 동시에 가장 끔찍한 악몽일 수도 있었다.
“일단 탐사선 속도를 30%로 줄이고, 모든 시스템을 비상 대기 상태로 전환해. 박 부함장은 센서 데이터를 재확인하고, 김 대장은 탐사 준비를 서두르십시오. 일단 근접 관측이 우선이다.”
캡틴의 명령에 따라 함선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미지의 존재를 향한 느린 전진은 마치 거대한 어둠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함교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연이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 곧 맞닥뜨릴 진실에 대한 예고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시간인지, 아니면 며칠 밤낮이었는지, 정확한 감각조차 사라진 듯했다. 어둠 속에서 마침내, 그것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캡틴, 시각 탐지 성공.” 류승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카시오페아 호의 전면 스크린에 잡힌 영상은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행성이 아니었다.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었다. 아니, 인공이라는 단어조차 적절치 않았다. 그 형상은 어떤 문명도, 어떤 생명체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세상에….” 엔지니어 한아람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경외와 공포로 뒤섞여 있었다.
의료담당 최유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뼈대가 드러난 듯했다. 검은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색이라 규정할 수도 없는 심연의 색깔. 비정형의 거대한 덩어리.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대신,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표면은 그 존재 자체로 주변 공간을 뒤틀어 놓는 것 같았다.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그 거대한 구조물은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직선과 곡선이 기괴하게 뒤섞이고,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각도로 꺾여 있었다. 마치 차원 자체가 뒤틀려 응고된 잔해 같았다.
“이건… 우리가 아는 물질이 아니야.” 박선우 부함장이 데이터를 분석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센서가 계속 오류를 냅니다. 표면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깝고, 내부 밀도는… 말도 안 되는 수치입니다.”
그것은 회전하지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영원히 멈춰 선 채로 존재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고요함 속에서, 카시오페아 호의 승무원들은 그 압도적인 침묵의 무게에 짓눌렸다.
“캡틴… 이 물체에서… 어떤 파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류승민이 갑자기 몸을 떨었다. “아니, 파장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건… 소리도, 빛도, 어떤 에너지도 아닙니다. 그냥… 존재 그 자체가…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습니다.”
“류 항해사, 진정해.” 이지안 캡틴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막연한 공포.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듯한 기시감.
김현민은 이미 탐사선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탐구심이 더 크게 드리워져 있었다.
“캡틴, 저희가 근접 탐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저것은 인류의 지평을 바꿀 발견입니다!”
“아니, 기다려.” 이지안 캡틴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스크린 속 기괴한 구조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저것은 마치… 고대 신화 속 괴물들의 심장처럼 보이는군.*
그때, 거대한 구조물의 표면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무수히 뒤틀린 면들 중 하나가 마치 눈꺼풀처럼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틈새는 절대적인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아주 미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이지안 캡틴은 똑똑히 보았다.
“젠장…!” 한아람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 빛은 우리가 아는 어떤 빛과도 달랐다. 무지개색이었지만 동시에 모든 색을 부정하는 듯한, 인지할 수 없는 색채였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정신을 직접 긁어내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시오페아 호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비상등이 붉은색으로 깜빡이며 함교를 뒤덮는 순간, 류승민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내 머릿속에…! 누군가… 누군가 내 머릿속에 들어왔어!”
그의 절규와 함께, 스크린 속 거대한 구조물의 틈새가 활짝 열렸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이제 어떠한 여과도 없이 카시오페아 호를 집어삼켰다. 그 빛 속에서, 이지안 캡틴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오직 꿈에서나 존재할 법한 형상들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문어의 촉수 같기도, 수십 개의 눈동자 같기도 한 형상들이 끊임없이 변형되며 그녀의 정신을 침범하는 듯했다.
“모두 진정해! 제정신을 붙잡아!” 이지안 캡틴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그녀의 목소리조차 비현실적인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때, 김현민 대장이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홀린 듯이 제어판에 손을 뻗어, 기어코 탐사선 발사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카시오페아 호의 격납고에서, 작은 탐사선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미지의 존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지안 캡틴은 절망적인 눈으로 탐사선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귓가에, 수십만 년 전의 심연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듯한,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_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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