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삭월(朔月)의 그림자
휘안의 북쪽, 성벽에서 한참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 위에 이안의 초라한 집이 홀로 서 있었다. 겉보기엔 그저 낡은 기와집일 뿐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숨 막힐 듯 쌓여 있는 서책과 고물들 때문에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먼지 낀 서가에는 겹겹이 쌓인 죽간과 필사본, 흙먼지가 뒤덮인 도자기 파편들이 위태롭게 놓여 있었다. 그는 이런 혼돈 속에서 비로소 숨을 쉬는 듯했다.
이안은 두꺼운 안경 너머로 촛불 아래 놓인 오래된 비단 지도 조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지도는 섬세한 상형문자로 가득했으며, 그중 몇몇은 희미한 초록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지도의 표면을 쓸자, 까칠한 비단실의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 지도는 지난주, 한성 시전(市廛)의 한 고물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당시 고물상 주인은 그저 색 바랜 낡은 천 조각이라며 헐값에 내놓았지만, 이안의 눈에는 한눈에 범상치 않은 유물로 보였다.
“흠… 이것은… 분명 ‘별의 언어’인데.”
그의 중얼거림은 고요한 방 안에 나지막이 울렸다. ‘별의 언어’는 이 새벽 왕국에서는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선조 문명 시대의 문자였다. 공식적인 역사에서는 왕국 건국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문명을 미개하고 야만적인 것으로 치부했지만, 이안은 달랐다. 그는 건국 이전의 문명이 현재보다 훨씬 고도화된 지식과 기술을 가졌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증거를 찾아 평생을 바쳐왔다. 때문에 그는 주류 학계에서는 ‘괴짜’ 혹은 ‘미친 학자’로 낙인찍힌 지 오래였다.
“이 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기묘한 문양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선들이 뻗어 있었다. 그 선들은 마치 복잡한 혈관처럼 얽히고설켜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오랫동안 밤을 새워가며 지도를 해석했지만, 쉬이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나지막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두 번 더 이어졌다. 이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 외진 곳에 자신을 찾아올 이는 거의 없었다. 대개는 학술원 제자들 중 호기심 많은 이들이거나, 아니면 혹독한 연구 생활에 지쳐 떨어져 나간 자들이었다.
“누구시오?”
그의 목소리에는 불청객에 대한 불편함이 묻어났다.
“저… 이안 선생님 되시는지요? 한성 시전의 진귀품당(珍貴品堂)에서 왔습니다.”
젊고 조금은 떨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진귀품당이라니. 이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귀품당은 왕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큰 규모의 골동품 및 유물 감정소였다. 자신과는 좀처럼 엮일 일이 없는 곳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잔뜩 얼어붙은 듯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한밤중에 이런 곳까지 온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소년의 품에는 낡은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그… 저, 선생님께 전달할 것이 있다고 해서… 진귀품당 당주님께서 급히 보내셨습니다.”
소년은 잔뜩 긴장한 듯 보였다. 이안은 소년을 집 안으로 들였다. 촛불 아래 드러난 소년의 얼굴은 한층 더 창백해 보였다.
“당주님이 뭘 보내셨다는 것이냐?”
이안의 물음에 소년은 품속의 보따리를 조심스럽게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보자기를 펼치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돌덩이였다. 그러나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었다. 표면은 매끄럽게 가공되어 있었고,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듯했다. 돌에는 이안이 방금 전까지 들여다보던 비단 지도 조각과 똑같은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은… 어디서 난 것이냐?”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며칠 전, 서쪽 해안가 마을에서 어부가 건져 올린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당주님께서 보시더니… 심상치 않다고 하시며 선생님께 가져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이안은 말없이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 같은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이 돌은 단순히 돌이 아니었다. 어떤 광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연구해 온 선조 문명의 유물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 비단 지도 조각에 새겨진 문양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문양까지.
그는 돌에 새겨진 문양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돌의 표면에서 푸른빛이 더욱 선명하게 피어났다. 소년은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선생님…!”
이안은 소년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에 집중했다. 푸른빛은 잠시 깜빡이더니, 이내 돌의 한쪽 면에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새로운 문양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비단 지도 조각에 표시된 중심 문양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 옆에, 작은 점 하나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좌표인가?”
이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돌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자 열쇠였다. 그리고 그 길은 분명, 오랫동안 그가 찾아 헤매던 선조 문명의 흔적, 어쩌면 잊혀진 지하 유적지로 이어질 터였다.
“당주님께서… 이 돌을 만지자마자, 갑자기 온몸이 떨리고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물건인 것 같다고… 혹시 아는 바가 있으실까 하여…” 소년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안은 소년의 말을 한 귀로 흘렸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돌이 가리키는 방향,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비단 지도와 이 돌. 두 가지 조각이 드디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소년아, 네게 큰 부탁이 하나 있다.”
이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한층 단호하고 결연했다.
“네?”
“이 일을 당주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일절 발설하지 마라. 그리고… 나는 잠시 집을 비울 것이다. 혹 누군가 나를 찾거든, 내가 오래된 문헌을 찾아 저 먼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고 전해라.”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생님, 지금 밤입니다. 대체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이안은 돌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십 년간 찾아 헤매던 답이 내 눈앞에 있다. 어찌 이대로 시간을 낭비할 수 있겠느냐. 이 돌이 가리키는 곳, 그곳에 내가 찾던 모든 진실이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어둠을 향했다. 삭월(朔月)이 드리운 밤하늘은 칠흑 같았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떤 밤하늘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길고 길었던 기다림이 마침내 끝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 길의 끝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학자로서의 사명, 그리고 오랜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될 참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낡은 가죽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등불, 필기도구, 그리고 지도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몇몇 도구들. 소년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이안의 눈빛에서 전에 없던 강렬한 불꽃을 읽었다. 저 불꽃은… 미친 자의 광기가 아니라, 무언가에 미친 듯이 열망하는 자의 순수한 열정이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소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안은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뇌와 집착이 빚어낸 깊은 주름들이 선명했지만, 지금은 그 위에 묘한 활기가 감돌고 있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다. 침묵하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이 땅에 묻혀 있던 진실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날 날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안은 돌덩이를 품에 단단히 안고, 방금 전까지 들여다보던 비단 지도 조각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어둠 속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휘안의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의 그림자 속으로, 이 세상의 역사를 뒤흔들 비밀을 향한 한 사내의 모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