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심장은 재가 되어 무너져 있었다. 한때 희망으로 빛나던 높은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스러져갔고, 거리는 침묵의 비명으로 가득했다. 그 모든 폐허의 중심에, 그녀가 서 있었다.
강하은.
아니, 이제는 그저 ‘그녀’라고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한때 찬란한 빛의 세라피나로 불리며 모두의 희망을 짊어졌던 소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오직 심연의 어둠, 그리고 지독한 복수의 서늘한 기운뿐이었다.
하얀 달이 폐허 위로 차가운 은빛 조각들을 흩뿌렸다. 그 빛은 그녀의 검은 제복에 닿아 부서졌고, 핏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두 눈동자에 흡수되는 듯했다. 공기 중에는 묵직한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살얼음처럼 날카롭고, 칼날처럼 잔혹했다.
“나를… 찾아왔구나.”
메마른 목소리가 폐허의 정적을 갈랐다. 마치 유리 조각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그녀의 발밑에서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그것들은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는 굶주린 짐승들처럼 으르렁거렸다.
저 멀리, 무너진 고층 빌딩의 잔해 틈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그 빛은 한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갖추었다. 창백한 얼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한 몸. 하지만 그 속에는 한때 하은과 함께 이 세계를 지켰던, 아름답지만 독이 든 장미 같은 마법 소녀, 엘레나의 모습이 흐릿하게 겹쳐 있었다.
서유진.
하은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그녀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찢어발긴 배신자.
유진은 하은을 보자마자 본능적인 공포에 사로잡힌 듯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고, 입술은 경련하듯 떨렸다.
“하은아… 제발… 오해야… 모든 게…”
유진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간절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비명이었다. 하지만 하은에게는 그것이 그저 역겨운 변명으로 들릴 뿐이었다.
“오해?” 하은이 낮게 읊조렸다. “내가 네 등 뒤에 꽂힌 칼날을 오해했단 말이니, 유진아?”
그 순간, 하은의 눈앞에 끔찍한 기억의 파편이 섬광처럼 스쳤다.
*그때였다. 거대한 악으로부터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던 순간. 하은은 모든 것을 걸고 빛의 방패를 펼쳤다. 옆에는 언제나처럼 유진이, 엘레나로서 그녀를 돕고 있었다. 믿었다. 절대적으로. 유진의 미소는 늘 하은의 가장 큰 위로였다. 그러나 그 미소가 일그러지는 찰나,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등에 파고들었다. 뒤돌아본 하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마법력을 흡수하며 섬뜩하게 웃고 있는 유진의 얼굴이었다. “미안해, 하은아. 하지만… 이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야.” 그 한 마디와 함께 빛의 방패는 산산조각 났고, 세계는 어둠 속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은은, 끝없이 추락했다.*
끔찍한 기억은 하은의 심장을 얼음처럼 차갑게 만들었다. 그녀의 주변을 휘감던 그림자들이 더욱 격렬하게 요동쳤다.
“네가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했던 짓을, 이제 와서 오해라고 부르는 거야?” 하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 번개가 일렁였다. “이 폐허가, 이 죽음의 도시가, 그리고 내 안의 이 모든 고통이, 다 오해 때문이라고?”
유진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나는 그저… 힘이 필요했을 뿐이야! 더 큰 힘을 얻어서… 우리 둘 다 살아남으려고!”
“살아남아? 너는 살아남았겠지. 내가 바닥에 처박혀 모든 것을 잃는 동안, 너는 그 ‘더 큰 힘’으로 무얼 했지?” 하은의 시선이 유진의 전신을 꿰뚫었다. “네가 얻은 힘은… 나를 짓밟고, 수많은 생명을 제물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었을 뿐이야.”
어둠이 하은을 감쌌다. 그녀의 마법 소녀 제복은 이제 더 이상 세라피나의 순백이 아니었다. 밤하늘을 닮은 심연의 검은색, 그리고 피처럼 짙은 붉은색이 뒤섞인 새로운 형태였다. 그녀의 등 뒤로, 검은 날개처럼 보이는 그림자 에너지의 파동이 솟아올랐다.
“엘레나, 네가 그토록 혐오하던 어둠의 힘에 스스로 뛰어들었으면서, 지금 와서 나의 복수를 막으려는 건가?”
유진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그녀의 손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장미 형태의 마법이 하은의 거대한 어둠 앞에서 힘없이 흔들렸다. 유진은 이제 ‘엘레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하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운명에 처한 가엾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안 돼! 하은아! 우리… 우리 함께했던 시간들을 생각해줘! 우리는 친구였잖아!” 유진은 마지막 발악처럼 외쳤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은 한때 하은이 가장 사랑했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은은 이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모든 아름다운 추억들은, 유진의 칼날에 의해 이미 짓이겨지고 찢겨 나갔을 뿐이었다.
“친구? 네가 내 모든 것을 짓밟기 위해 꾸민 덫이었을 뿐이야, 유진아.”
하은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자 그림자들이 뱀처럼 솟아올라 유진의 몸을 얽어매기 시작했다. 유진은 비명을 질렀지만, 그림자들은 그녀의 마법을 억누르며 단단히 조여왔다. 그녀의 희미한 마법력은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너는 나에게서 빛을 빼앗았다. 나에게서 세계를 빼앗았다. 나에게서… 나 자신을 빼앗았다.”
하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유진을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도, 분노도 아닌, 오직 텅 빈 허무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복수는 그녀를 채워주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더 깊은 심연으로 끌고 갈 뿐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으니까.
“그러니, 이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게 돌려줄 차례야.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이야.”
하은의 손짓 한 번에, 유진의 몸을 얽어맨 그림자들이 더욱 거세게 빛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유진의 마법 소녀 제복이 흐릿해지며, 그녀의 힘이 서서히 소멸해갔다. 유진은 절규했다. 그녀의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게… 네가 내게 주었던 고통의… 아주 작은 조각이야.”
하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어떠한 자비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어둠은 유진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녀의 마력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유진의 몸은 폐허 위에 힘없이 쓰러졌다. 더 이상 마법 소녀 엘레나가 아니었다. 그저 한없이 나약한 인간, 서유진만이 남아있었다.
하은은 쓰러진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유진의 눈에는 절망과 공포만이 가득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야, 유진아.” 하은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모든 것을, 하나씩, 아주 천천히, 되찾아갈 거야.”
그녀의 발밑에서 꿈틀거리던 그림자들이 춤을 추듯 하은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은은 더 이상 세라피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복수의 화신, 어둠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존재였다.
달빛 아래, 폐허의 정적 속에서 하은의 검은 실루엣만이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복수극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심연 속으로 이어질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