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망각의 성채’ 지하 미궁.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부 아래, 수백 년간 잊힌 그림자가 쉬고 있는 곳이었다. 카이는 낡아빠진 가죽 장갑 위로 굳은살 박힌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량도, 잠자리도 없이 유적의 잔해만을 뒤지고 있었다. 놈들이 턱밑까지 쫓아오고 있었고, 여기서 빈손으로 나간다면 그의 목숨은 영영 끝나리라.
“젠장, 도대체 뭘 숨겨놓은 건데…….”
카이의 중얼거림은 습한 공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오래된 석조 벽화에는 이제는 의미조차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인 통로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보랏빛 균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일반적인 광원이 아니었다. 마치 차원의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기이하면서도 유혹적인 빛이었다.
카이는 망설였다. 이런 곳에서 발견되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대부분 죽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이미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희망이 없는 절망 속에서, 불확실한 빛은 맹목적인 이끌림이 되었다.
“죽기 살기로 버틴 대가가 이런 허상 따위라면, 비웃어주지.”
그는 품속에서 녹슨 단검을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균열에 다가섰다. 보랏빛 안쪽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가까이 갈수록 차가운 냉기가 피부에 닿는 듯했다. 빛과 냉기, 상반된 감각이 동시에 카이를 휘감았다. 균열 주변의 돌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이가 손을 뻗어 균열을 감싼 벽에 닿는 순간,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확장됐다. 보랏빛 섬광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카이의 시야를 잠식했다. 동시에 강렬한 힘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카이는 차가운 돌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아까 그 균열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균열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틈이 생겨 있었고, 그 안에서 더욱 깊은 어둠이 고여 있는 듯했다. 그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공간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어둠인 듯한, 무형의 실체가 그곳에 있었다.
강렬한 호기심이 그의 공포를 덮어눌렀다. 단검 끝으로 조심스럽게 틈을 벌렸다. 틈 안쪽은 생각보다 넓은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공기가 후욱, 하고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썩은 흙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성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 안은 숭고하리만치 거대한 원형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듯한 제단이 솟아 있었고, 그 위에 마치 잠들어 있는 심장처럼 거대한 검은 수정이 놓여 있었다. 수정은 빛을 흡수하는 듯, 주변의 모든 그림자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카이의 눈에는 수정 주변의 어둠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건 대체…….”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제단에 발을 내디뎠다. 바닥에 깔린 먼지 속에서 희미한 발자국들이 보였다. 자신 외에도 이곳을 찾은 이들이 있었다는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발자국들은 모두 제단 앞에서 멈춰 있었다.
제단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검은 수정은 그 어떤 광원도 없이 스스로 어둠을 발하고 있었다. 수정 표면에는 복잡한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움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카이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손끝이 수정에 닿기 직전, 그의 뇌리에 섬뜩한 경고음이 울렸다. 멈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손가락 끝이 검은 수정의 차가운 표면에 닿는 순간, 세계가 일순 정지하는 듯했다.
쉬이익-!
수정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그의 팔을 휘감았다. 연기는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팔을 타고 올라와 목을 조르고, 얼굴을 덮었다.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수억 년의 어둠이 응축된 듯한 거대한 정보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귓가에 수많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속삭임, 비명, 절규,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주문들. 그것들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명확하게 그에게 속삭였다. ‘환영한다’, ‘우리의 유산을 받아들여라’, ‘너는 이제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다.’
카이는 무릎을 꿇었다. 검은 연기가 온몸을 뒤덮고 그의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듯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쿵, 쿵, 쿵!
어디선가 거대한 존재가 발을 내딛는 듯한 둔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카이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과 연결된, 이 어둠의 힘에 이끌려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봉인이 풀린 것을 알리는 전령의 소리이자, 그를 파멸로 이끌 존재의 발소리였다.
그의 눈동자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손끝에서 검은 번개가 튀어 오르고, 주변의 그림자들이 마치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듯 꿈틀거렸다.
“크아악!”
본능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고통과 힘, 그리고 알 수 없는 존재의 울부짖음이 뒤섞인 기괴한 포효였다.
벽의 먼지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천장 일부가 무너지며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카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검은 수정의 힘에 완전히 잠식된 듯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년간 잠들어 있던 사원의 수호자, 혹은 봉인된 힘의 그림자가 깨어난 것이다. 놈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나며, 새로이 각성한 어둠의 기운을 따라 카이를 응시했다.
카이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고 믿었다. 절박함이 그를 이끌었고, 호기심이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깨달았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 모든 과정은, 어쩌면 그를 노린 고대의 함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이제 이 거대한 힘의 숙주가 되어버렸다. 어둠이 그를 완전히 잠식하기 직전, 그의 뇌리에 마지막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제 무엇이 되는 거지?’
그의 몸을 감싸던 검은 연기는 더욱 짙어져, 그의 형태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새로운 힘이 울부짖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