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34분. 김민준은 스마트폰 화면을 힐끗 보며 한숨을 쉬었다. 20평 남짓한 아파트는 퇴근 후의 고단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거대한 폐기관 같았다.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구두가 제자리를 찾을 기미도 없이 널브러져 있었고, 거실에는 어제 먹다 남긴 인스턴트 식품 용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침실로 향했다. 씻고 바로 자고 싶었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찌릿,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벌써 갈 때가 됐나.’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샤워기를 틀었다. 뜨거운 물줄기가 어깨를 때리자 온몸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저 멀리 거실 쪽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떨어지는 소리.
“뭐지?”
수도꼭지를 잠그고 귀를 기울였다. 고요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나 싶어 다시 샤워기를 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 켜두었던 TV 리모컨을 실수로 발로 건드렸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보니 거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민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테이블 위에 잘 놓아두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내가 잠결에 건드렸나…?”
대수롭지 않게 주워 올렸다. 피곤이 극에 달하면 이런 사소한 착각도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천천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새벽 2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에 민준은 눈을 번쩍 떴다. 에어컨은 분명 꺼져 있었다. 보일러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침실 공기는 한겨울 동굴 속처럼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물컵이 스르륵,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컵 안의 물이 출렁거렸다.
민준의 심장이 발광하듯 뛰어댔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컵이 움직인 걸까,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걸까. 눈을 비볐다. 컵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누, 누구세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침묵만이 민준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먹어치울 듯 거실 쪽에서부터 밀려왔다. 그때였다. ‘삐이익-’ 하는 불쾌한 소음과 함께 침실 문이 저절로 스르륵 열렸다.
문 너머는 암흑이었다. 늘 지나다니던 복도가 아니었다. 복도에 켜두었던 작은 무드등의 불빛조차 닿지 않는, 흡사 심연 같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기가 밀려들어왔다.
“말도 안 돼….”
민준은 더듬더듬 스탠드 조명을 켰다. 불빛이 미약하게 침실을 비췄지만, 문 너머의 어둠은 굳건했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손전등 기능을 켰다. 한 줄기 빛이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갔다.
복도는 사라져 있었다.
침실 문은 이제 거대한 벽감으로 변해 있었다. 그 벽감 안에는 낡고 녹슨 철문이 박혀 있었다. 철문에는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들 사이로는 끈적한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민준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꿈일 리가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너무나 생생했고, 몸의 모든 세포가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철문으로 다가갔다. 섬뜩한 한기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손을 뻗어 문에 닿으려 하자, 문양들 사이에서 눈알 같은 형체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혐오감에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철문이 ‘끼이익’ 하고 천천히 열렸다. 마치 누군가 안쪽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어두컴컴한 통로였다. 통로의 벽면은 콘크리트가 아닌, 축축하게 젖은 흙벽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그의 아파트는 이미 그의 아파트가 아니었다. 침실 문이 열어젖힌 공간은 아파트라는 일상의 틀을 깨부수고, 미지의 던전 입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포에 질린 민준은 침실 벽을 더듬었다. 창문! 창문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침대 옆에 창문이 있었는데, 이제 그 자리는 매끈한 회색 벽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긴급 신고를 하려 했지만, 화면에는 ‘서비스 지역 아님’이라는 문구만 떴다.
“젠장!”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 이 방을 나가야 했다. 철문 너머로 이어지는 통로는 어둡지만, 어쩌면 탈출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축축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통로는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자, 거미줄이 얼굴에 달라붙고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에 떨어졌다.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는 진흙 같은 것이 질척거렸다. 이 통로가 정말 아파트 안이란 말인가?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민준은 전력 질주했다. 불빛이 있는 곳은 거실이었다. 하지만 그의 거실이 아니었다.
탁 트여 있어야 할 거실은 마치 동굴처럼 넓게 확장되어 있었다. 천장은 족히 10미터는 넘어 보였고, 거대한 기둥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다. 그의 소파는 바위에 파묻힌 채 녹슨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TV는 거대한 검은 수정체로 변해 있었다. 수정체에서는 은은한 보랏빛이 흘러나왔다.
“이게… 뭐야….”
민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공간 자체가 뒤틀리고 변형된 것이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평범한 도자기 화병은 이제 인간의 심장처럼 뛰는 붉은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 덩어리에서 섬뜩한 맥박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거실 한가운데서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고, 안개 속에서 수많은 손들이 솟아 나왔다. 그 손들은 뼈만 앙상한, 사람의 형상을 띈 손들이었다. 손들은 허공을 휘저으며 민준을 향해 뻗어 왔다.
“악!”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손들이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마치 그를 잡아채기라도 할 듯이. 그는 이성을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디로? 알 수 없었다. 그저 달려야 했다.
그는 부엌으로 이어지는 입구로 몸을 던졌다. 부엌 역시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싱크대는 이끼 낀 돌덩이로 변했고, 냉장고는 거대한 얼음 결정체로 덮여 있었다. 얼음 결정체 안에서는 마치 누군가 얼어붙은 듯한 형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콰앙!’
뒤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거실의 바닥이 완전히 붕괴된 소리였다. 민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현관문 자리였다. 현관문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문이 아니었다. 문틀은 뼈로 만들어진 듯 울퉁불퉁했고, 문고리는 기괴하게 뒤틀린 촉수 같은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뼈로 된 문틀을 잡는 순간, 뼈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촉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냈다.
그때였다.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이듯, 하지만 뼈 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음성.
“가지 마… 너는 영원히 여기 있을 거야….”
민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채 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촉수가 그의 손목을 감싸 쥐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비틀었다. ‘뜯겨나가도 좋다’는 심정으로 힘껏 잡아당기자, 문이 ‘끼이이이익’ 하는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문 너머는 암흑이었다. 또 다른 던전으로 향하는 입구인가? 아니면…?
그는 눈을 질끈 감고 그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헉! 헉! 헉!”
민준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어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침실, 익숙한 가구들. 창문 밖으로는 희미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꿈이었나?
그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오전 6시 12분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간밤의 모든 악몽은 꿈이었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 문을 열었다. 익숙한 복도, 익숙한 거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소파 위의 리모컨, 테이블 위의 도자기 화병.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그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세게 잡혔다 놓인 것처럼,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그의 피부에 새겨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침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 공간을 ‘집’이라 부를 수 없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의 아파트는 이제, 잠재된 던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던전에서 밤마다 깨어나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다시 한번 그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