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제일 마법소녀
### 1. 잊혀진 별자리의 속삭임
고작 열일곱 해를 살아온 이하나에게, 세상은 그저 흘러가는 강물과 같았다.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밍밍한 일상. 따분한 학교 수업과 친구들과의 시답잖은 수다가 그 강물의 전부였다. 낡은 상가 건물 3층, 창문 너머로 도시의 텁텁한 매연과 소음이 밀려드는 작은 방. 그곳이 하나의 성이자, 유일한 안식처였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방과 후였다. 하나는 손에 쥔 어릴 적 그림책을 무심히 넘기며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칙칙한 표지의 그림책은 오래되어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동화 속 공주님은 언제나 아름다웠고, 왕자님은 늘 용감했다. 마법 지팡이로 악당을 물리치는 마법사는 하나가 가장 동경하던 존재였다. 현실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으니까.
“에휴, 나도 마법사나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하나. 그녀의 시선은 낡은 책장 한 구석에 박혀 있던, 까맣게 색이 바랜 나무 상자에 닿았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네가 진짜 어른이 되면 열어보렴” 하고 건네주었던 상자였다. 그 의미도 모른 채 구석에 처박아 둔 지 몇 년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문득,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오늘따라 그 상자가 유난히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낡은 그림책을 옆으로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먼지 쌓인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손때 묻은 표면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지만, 세월의 흔적에 마모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할머니, 이거 대체 뭐예요?”
자물쇠도 없는 상자의 뚜껑을 살며시 들어 올리자, 퀴퀴한 나무 냄새와 함께 오묘한 빛깔의 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천 조각을 걷어내자, 마침내 상자 속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펜던트였다. 오래된 황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몸체에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청록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보석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깊이 속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마치 작은 별을 가둬놓은 것 같기도 했다. 펜던트 뒷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나가 펜던트를 집어 들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 순간, 펜던트의 청록색 보석이 심장 박동처럼 미세하게 반짝였다. 하나는 놀라 숨을 멈췄다. 낡은 방 안에서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는 듯한 이 기이한 현상은 대체 무엇인가?
“뭐야, 고장 난 건가?”
아니, 고장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펜던트는 하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그녀는 홀린 듯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차가웠던 감촉은 이내 따스하게 데워졌고,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이 하나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창문 밖에서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다. 하나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몸을 웅크렸다. 파편이 튀는 소리와 함께 낯선 이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안에 있다! 빨리 잡아!”
“이곳에 숨겨져 있을 줄이야… 당장 끌어내!”
무슨 상황인지 알 수도 없었다. 하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침대 밑으로 숨었다. 현관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거친 발걸음이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어디 있느냐! 빨리 나와라!”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거대한 체구에 얼굴을 가린 검은 복장의 그림자 같은 존재들. 그들의 손에는 기이한 형태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강렬한 살기와 함께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침대 밑에 웅크린 하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림책이었다. 마법 지팡이를 든 마법사가 악당을 물리치는 페이지. 그 그림이 왜 이리 선명하게 보이는 걸까.
그 순간, 하나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그녀의 심장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솟구쳐 오르는 느낌. 두려움에 떨던 몸은 어느새 미약한 떨림으로 변했다.
“크윽…!”
검은 그림자 중 하나가 삐죽 튀어나온 침대보 끝자락을 보고 달려들었다. 거친 손이 하나의 발목을 잡으려는 찰나, 눈앞이 번쩍였다.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
귓가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잊혀진 별자리의 힘이여,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하나의 전신에서 청록색 빛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침대 밑을 뚫고 솟아오른 빛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검은 그림자들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빛이 걷히고, 그 자리엔 더 이상 평범한 이하나가 서 있지 않았다.
몸을 감싼 새하얀 제복은 밤하늘의 별을 수놓은 듯 반짝였고, 머리 위에는 청록색 보석이 박힌 은빛 티아라가 빛났다. 손에는 이전에는 없던, 길고 가느다란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지팡이 끝의 보석에서는 펜던트와 같은 청록색 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이건 대체…?”
하나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그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깊고 단단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
눈앞의 검은 그림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법소녀…? 말도 안 돼! 이 시대에 그런 존재가 나타날 리가…”
“젠장! 계획이 틀어졌군! 그래도 그냥 둘 순 없다! 공격해!”
그림자들이 동시에 무기를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팔꿈치에서 손끝으로, 온몸의 에너지가 지팡이로 모였다. 지팡이 끝의 보석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더니, 청록색의 마법 장막이 펼쳐지며 그림자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게… 내 힘이라고?”
믿을 수 없는 현실. 하지만 이 힘은 분명 하나의 것이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용기.
“너희들… 대체 뭐야!”
하나의 외침에 공기가 진동했다. 마법 장막 뒤에서 그녀는 그림자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더 이상 두려움에 떨던 소녀가 아니었다. 이제 막 깨어난, 이름 없는 별의 힘을 품은 마법소녀였다.
바로 그때였다. 방 안의 스피커에서 갑자기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TV도 라디오도 켜져 있지 않았는데, 그 목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모든 공간을 지배했다.
“천하제일 무도대회, 무신각(武神閣) 대천하제전(大天下祭典)이 한 달 후, 만월의 밤에 개최될 것이다.”
목소리는 묵직하게 이어졌다.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무림의 고수들이여, 그리고 새로이 각성한 힘의 소유자들이여. 천하의 운명은 이제 너희의 손에 달렸다. 혼돈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 땅을 구할 자는 오직 단 한 명, 대천하제전의 승자뿐이다!”
목소리는 홀연히 사라졌다.
방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검은 그림자들도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곧, 그들의 시선이 하나의 지팡이에, 그리고 그녀의 빛나는 제복에 집중되었다.
“대천하제전… 설마 이 계집이…?”
그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하나는 자신의 손에 쥔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천하의 운명? 무림 고수들? 혼돈의 그림자?
열일곱 이하나의 평범한 일상은, 잊혀진 별자리의 속삭임과 함께 그렇게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자신이 서 있는 이 자리가, 이제 막 시작된 거대한 무대의 첫 장이라는 것을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몸 안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힘과 용기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두려워 마라. 너는 홀로 강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