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빛 옥좌의 그림자
밤의 장막이 해청국의 수도, 화성(華城)을 짙게 드리웠다. 거대한 궐문 위로 걸린 초승달은 마치 날카로운 낫처럼 빛났고, 그 아래로 펼쳐진 도성은 낮의 번잡함을 잃은 채 기이한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 고요함 속에는 곪아 터지기 직전의 역병처럼, 뿌리 깊은 부패와 공포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환은 낡은 기와지붕 위에서 그림자처럼 몸을 숨겼다. 그의 눈은 달빛조차 침투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검게 변한 왼팔의 문신이 희미하게 아려왔다. 그것은 삼 년 전,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그날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잊을 수 없는 흉터였다.
“김도윤….”
나직이 읊조린 이름이 칼날처럼 그의 입술을 찢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모든 공적을 가로채 역적으로 몰아 가족들을 참혹하게 몰살시킨 비열한 놈. 자신은 죽은 줄 알았겠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영력이 봉인된 채 버려졌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환은 살아남았다. 오직 복수만을 위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망령처럼.
세월은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영력의 새로운 운용법,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나타나는 은신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복수의 칼날을 가장 예리하게 다듬는 법을.
그의 시선은 도성 북서쪽에 자리한 화려한 기와집으로 향했다. 저곳은 현 재상 박규철의 저택이었다. 김도윤이 왕좌에 오르기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자 중 하나. 당시 이환이 적으로 내통했다는 거짓 증언을 지어내고, 그의 가족들을 잔인하게 고문하며 김도윤의 사병들을 지원했던 악독한 자였다. 지금은 그 공로로 재상의 자리에 앉아 온갖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있었다.
“오늘 밤… 첫 번째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
이환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피 냄새를 맡은 짐승의 미소 같았다.
정오를 넘긴 깊은 밤, 박규철의 저택에서는 여전히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화려한 등롱이 밤하늘을 수놓고, 기녀들의 웃음소리와 풍악 소리가 담장을 넘어 흘러나왔다. 탐욕스러운 얼굴의 귀족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비루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환은 그림자 속에 녹아들 듯 저택의 담장을 넘었다. 영력으로 몸의 기척을 완벽히 지워버리자,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저택을 에워싼 경비병들은 무의미했다. 그들은 그림자를 볼 수 없었고, 죽음을 감지할 수도 없었다.
안뜰을 가로질러 본채로 향하는 길. 한적한 복도에서 순찰을 돌던 경비병 두 명이 이환의 길을 막아섰다. 그들은 이환을 보지 못했으나, 이환은 그들의 움직임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촤악!
칼날이 뽑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경비병 두 명의 목덜미에 차가운 감촉이 스치고 지나갔다.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그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환은 망설임 없이 그들의 몸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이미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한 사냥꾼의 침착함만이 있을 뿐.
본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박규철의 침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과, 술에 취한 듯한 낮고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이환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굳게 잠긴 빗장은 영력으로 형상화한 무형의 칼날에 의해 순식간에 절단되었다. 삑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진한 술과 여인의 향내가 뒤섞여 역한 냄새를 풍겼다. 박규철은 온몸에 비단옷을 풀어헤친 채,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그의 옆에는 반쯤 옷을 벗은 기녀가 나른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환은 삐걱이는 마루 소리조차 내지 않고 박규철의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 차가운 그림자가 침대 위로 드리워지자, 기녀가 먼저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한없이 흐릿했고, 순간적으로 이환의 형체를 인식한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쉬익!
이환의 손에 들린 비수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녀의 목에 정확히 꽂힌 비수는 소리 없이 그녀의 숨통을 끊었다. 그녀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굳어졌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녀의 몸은 침대 위로 축 늘어졌다.
그제야 박규철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누… 누구냐?!”
잠에서 깬 박규철의 눈이 흐릿하게 이환을 찾아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검은 형체. 그 형체가 달빛을 받아 드러낸 얼굴은 마치 오랜 망자처럼 창백하고, 핏기 없는 입술은 비정하게 굳어 있었다.
“기억하는가, 재상 나리?”
이환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서늘하여, 마치 얼음장 같은 칼날이 심장을 후벼 파는 듯했다.
박규철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뜨였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함. 저 목소리, 저 분위기… 익숙하면서도 끔찍하리만치 낯선 존재감.
“네, 네놈은… 누구냐!” 박규철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이환의 얼굴을 훑었다.
“삼 년 전, 이 나라를 구한 영웅을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그의 가족을 멸문시키는데 앞장섰던 그날 밤을… 기억하는가?”
이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박규철의 귓속에 파고들어 날카로운 파편처럼 박혔다. 박규철의 얼굴은 삽시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단 하나의 이름.
“설마… 이환… 네놈인가! 이환이 살아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이 흔들렸다. 김도윤이 직접 확인했고, 자신 또한 그의 시신을 확인했다. 영력이 모두 봉인된 채 지독한 고문을 당했으니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 박규철. 나다.” 이환은 박규철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박규철의 얼굴을 완전히 뒤덮자, 박규철은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다.
“꺄아아악!”
그러나 이번에도 비명은 불완전했다. 이환의 손이 박규철의 턱을 움켜쥐었다. 바스러질 듯한 악력에 박규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끄럽다. 네놈의 더러운 비명은 아무도 듣지 못할 것이다.”
이환의 손에 들린 비수가 박규철의 눈앞에 번뜩였다. 칼끝이 박규철의 눈을 정확히 가리키자, 박규철은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네놈이 김도윤의 끄나풀이 되어 날 모함했던 그날,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아는가?” 이환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고, 영력이 뽑혀나가며, 사랑하는 가족들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그때의 절망을… 네놈은 감히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이환은 박규철의 턱을 놓아주었다. 박규철은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너는 지금도 호의호식하며 그날의 죄를 잊고 살고 있지.” 이환은 싸늘하게 웃었다. “나는 너에게 그날의 고통을, 아니, 그 몇 곱절의 고통을 되돌려줄 것이다.”
이환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박규철의 얼굴 앞에 던졌다. 그것은 박규철이 지난 삼 년간 저지른 온갖 부패와 비리, 그리고 김도윤과의 은밀한 뒷거래 내역이 상세하게 적힌 문서였다.
“이것은 네놈이 저지른 죄의 목록이다. 그리고 네놈의 더러운 비밀이 담긴 장부 또한 내 손에 있다. 너는 이 나라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김도윤의 앞잡이가 되어 온갖 악행을 저질렀지.”
박규철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저 문서는… 자신의 가장 은밀한 죄악이 담긴 것이었다. 어떻게 저것을…
“도… 도대체 어떻게…!”
“방법은 중요치 않다.” 이환은 비수를 다시 들었다. “중요한 것은, 네놈의 죄가 이제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비수가 박규철의 왼쪽 팔에 깊숙이 박혔다.
“크어억!”
박규철의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환은 그의 비명을 무시했다. 그는 비수를 뽑아내자마자 다시 박규철의 오른쪽 팔에 칼을 박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다리, 그리고 양 어깨.
뼈를 으스러뜨리고 살점을 찢는 듯한 잔혹한 고문. 박규철의 몸은 피투성이로 변했고, 그의 고통에 찬 비명은 이미 절규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환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빛날 뿐이었다.
“이것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이환은 피가 묻은 비수를 닦아내지도 않고 박규철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놈이 김도윤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것처럼, 네놈의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너는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살려달라 빌게 될 것이다.”
이환은 박규철의 멱살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박규철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어버린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이 네놈에게는 과분하다. 너는 네놈의 죄가 만천하에 공개된 후, 백성들의 증오와 손가락질 속에서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이환은 박규철의 팔을 놓고 그를 다시 침대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방을 빠져나오기 전, 그의 손에 들린 비수가 박규철의 목에 마지막으로 깊숙이 박혔다. 고통에 일그러진 박규철의 얼굴에 마지막 경련이 일었고, 이내 그의 눈은 허망하게 풀렸다.
털썩.
시체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환은 피 묻은 비수를 소매에 대충 닦아 넣고 방을 나왔다.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저택 밖으로 나온 이환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승달은 여전히 날카로운 낫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고요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박규철은 시작에 불과했다.
“김도윤… 네놈이 앉아있는 그 핏빛 옥좌는 결국 네 무덤이 될 것이다.”
이환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 막 시작된 복수의 칼날은 수많은 피를 부를 것이었다. 이환은 밤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의 발걸음은 다음 사냥감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화성에는 이제 피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