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은 오래된 저택의 서재는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내리고, 번개가 칠 때마다 섬광이 방 안을 잠깐씩 비췄다. 낡은 책장에는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듯한 기묘한 문양의 고서들이 가득했고, 그 한가운데 놓인 앤티크 책상 위에는 누군가의 필체가 빼곡히 채워진 양피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준호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양피지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울렸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두웠고, 피부는 생기 없이 창백했다. 몇 년 전, 그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글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양피지에는 강민준의 서명이 선명했다. 민준. 한때 이준호의 유일한 친구이자, 세상의 모든 비밀을 함께 탐구하기로 맹세했던 동지. 그리고 그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배신자.
이준호의 입가에 찢어진 상처처럼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 차라리 찢어지고 녹아내렸어야 할 이 육신이, 기어이 돌아왔다. 복수를 위해.
“민준아…”
그의 목소리는 끓어오르는 잿더미처럼 탁하고 거칠었다. “네가 날 버린 그 순간, 나는 너를 똑같이 찢어 발기리라 맹세했다. 그리고 이제, 그 맹세를 지킬 시간이다.”
***
시간은 기묘하게 흐른다. 인간의 척도로는 몇 년이었지만, 이준호가 갇혔던 그 ‘사이의 공간’에서는 영겁과도 같았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지배하는 그곳에서 그는 육신이 녹아내리고, 정신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그는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로 변이했다고 해야 할지.
그는 그곳에서 ‘그들’의 속삭임을 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의 그림자가 그의 정신을 잠식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지식과 힘을 얻었다. 광기는 친구가 되었고, 절망은 스승이 되었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잃은 대가로, 그는 복수를 위한 무기를 손에 넣었다.
이준호가 돌아왔을 때, 강민준은 더 이상 작은 비밀 조직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는 어둠의 새벽회의 최고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막대한 부와 명예, 그리고 어둠의 힘을 손에 넣은 채, 그는 세상의 그림자 속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준호가 발견하려 했던 고대 문명의 유물, ‘심연의 눈’을 이용해 그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획득한 듯했다. 민준은 분명 이준호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제 손으로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확신하며, 역겨운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지도 모른다.
“가증스러운 놈.”
이준호는 민준의 저택을 멀리서 응시했다. 화려한 불빛이 번지는 저택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심장처럼 맥동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민준의 몰락은 서서히, 고통스럽게 진행되어야 했다. 그가 겪었던 고통의 백배는 돌려주리라.
복수는 이미 시작되었다. 몇 주 전부터 민준의 주변에서 기묘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충실한 부하들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렸고, 일부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녹아내리는 환영을 보고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둠의 새벽회에 바쳐진 제물들은 이유 없이 썩어 문드러지거나, 차원 너머의 무언가에게 흡수되는 듯 사라져버렸다. 민준은 분명 이를 불길한 징조로 여겼을 테지만, 그 원인이 자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이었다.
이준호는 밤마다 민준의 저택 지하 밀실에서 행해지는 의식을 지켜봤다. 그는 그림자 속에 숨어 민준의 모든 행동을 파악했고, 그의 불안이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밤, 민준은 밀실에서 초조한 얼굴로 ‘심연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유물은 검은 옥으로 만들어진 구슬이었는데, 그 안에는 우주 전체가 담긴 듯한 무한한 심연이 꿈틀거렸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일인가? 그분이 노하신 것인가?” 민준은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준호, 네가 죽었으니 방해할 자는 없다! 왜 나의 힘이 불안정한 것이지?!”
그 순간, 밀실의 그림자 속에서 이준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가 죽였다고 생각한 자는, 죽지 않았다, 민준아.”
민준의 몸이 얼어붙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워진 곳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어둠이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한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호였다. 하지만 예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눈은 빛을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깊었고, 피부는 핏기 하나 없이 희었다. 그의 몸에서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 이준호?!” 민준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졌다. “네가… 네가 어떻게 살아있지?! 내가 분명… 너를 그곳으로…!”
“그래, 네가 날 밀어 넣었지.” 이준호는 싸늘하게 웃었다. “잊을 리가 있나. 그 끔찍한 절망 속에서, 네 얼굴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민준은 ‘심연의 눈’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섰다. “말도 안 돼! 너는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그 누구도…”
“나는 누구도 아니게 되었으니까.” 이준호가 한 발자국 내딛자, 밀실의 공기가 뒤틀렸다. 벽에 걸린 촛불이 일제히 꺼지고, 오직 ‘심연의 눈’만이 희미한 빛을 발했다. “너는 내가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나는 너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을 얻었다. 너는 고작 이 구슬 하나로 세상을 지배하려 했지만, 나는 세상의 본질을 보았다.”
“닥쳐! 헛소리 마라!” 민준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래, 네가 돌아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나는 이제 너와 상대할 수 없는 존재다! 나는 그분의 힘을 받았어!”
“그분?” 이준호는 비웃었다. “네가 섬기는 그 ‘그분’이라는 작자는 고작 이 세계의 변방에서 기생하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네가 본 것은 진정한 심연의 그림자조차 되지 못한다.”
이준호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어둠이 뭉쳐지더니, 형언할 수 없는 형체로 변했다. 그것은 뱀처럼 꿈틀거리고, 촉수처럼 흔들리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듯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네가 내게 한 짓을 기억하나, 민준아?” 이준호의 목소리가 밀실을 채웠다. “나는 영겁의 시간 동안 존재하지 않는 공포 속에서 네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맹세했다. 네가 내게 선사한 그 고통을, 열 배 아니 백 배로 돌려주리라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민준은 ‘심연의 눈’을 자신에게 향하게 했다. 검은 구슬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민준의 몸을 감쌌다. “이 힘이라면 너 같은 건…”
“늦었다.”
이준호의 손짓과 함께, 밀실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벽은 엿가락처럼 휘고, 바닥은 찢어진 종잇장처럼 벌어졌다. 민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더 이상 익숙한 밀실이 아니었다. 비정형적인 색채의 물결이 몰아치고, 사방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이건 대체…! 안 돼! 말도 안 돼!” 민준은 비명을 질렀다. ‘심연의 눈’의 힘이 더 강력하게 분출되었지만, 그것은 이준호가 만들어낸 현실 왜곡 속에서는 미약한 불빛에 불과했다.
“네가 갇혔던 그 공간은 인간의 정신이 견딜 수 없는 곳이지.” 이준호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희미해졌지만, 그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은 너무나도 쉬운 안식이니까.”
민준의 몸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점차 아비규환의 혼돈으로 변해갔다. 이준호가 겪었던 그 ‘사이의 공간’이 민준의 정신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너는 보게 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색깔들을. 들리게 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비명들을. 그리고 영원히 느끼게 될 것이다. 인간의 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 ‘진실’의 무게를.”
민준의 육신은 흐릿해지고, 그의 존재는 마치 실오라기처럼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비명은 점차 멀어져갔고, 마지막에는 들리지 않는 침묵으로 변했다. ‘심연의 눈’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던 무한한 심연도 사라지고, 조각난 옥돌만이 남았다.
밀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휘어졌던 벽은 제자리를 찾았고, 꺼졌던 촛불은 다시 타올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준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심연처럼 깊었지만, 이제 더 이상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다. 복수는 끝났다. 민준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이준호가 택한 가장 잔혹한 복수였다.
하지만 그는 평화를 느끼지 못했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은 민준의 배신으로 죽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복수의 화신으로 태어나 그를 파멸시켰다. 이준호의 남은 존재는 무엇인가?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 ‘사이의 공간’에서 얻은 힘과 지식은 그에게 영원한 저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준호는 텅 빈 밀실을 뒤로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고, 그 그림자 속에는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 그는 홀로 존재했다. 복수는 끝났지만, 그의 영원한 방랑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