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연에 피어난 그림자 꽃
어둠이 삼킨 심연, 그 이름처럼 끝없는 심연의 가장 깊은 곳. 축축한 바위벽은 오랜 시간 동안 침식되어 괴이한 형상으로 굽이쳤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의 틈새에서는 알 수 없는 주술적 에너지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강하준은 숨을 죽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가죽 갑옷 위로 달라붙는 한기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순식간에 동상에 걸릴 정도였지만, 그의 육체는 수없이 던전을 드나들며 단련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 쥐인 마검 ‘어둠을 가르는 별’은 희미한 푸른빛을 뿜어내며 전방을 비췄다. 목표는 명확했다. 심연의 핵이라 불리는 곳에 잠들어 있다는 전설적인 마력 결정, ‘오리진 크리스탈’. 그것을 손에 넣는다면, 한동안 정체되어 있던 그의 마법 능력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할 터였다. 하지만 이 곳은 그림자 요정들의 영역. 단 한 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지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젠장, 이 정도 깊이라면…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하준의 중얼거림과 함께, 끈적한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많은 붉은 눈동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짐승형 마물들. 돌연변이 심연 늑대들이다. 놈들은 일반적인 심연 늑대와는 차원이 다른 덩치와 흉포함을 자랑했다. 놈들의 털가죽은 검은색 마력으로 뒤덮여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기괴한 그림자가 잔상처럼 흔들렸다.
“하아… 드디어 나타났군.”
하준은 검을 고쳐 잡았다. 여섯 마리. 평소라면 그리 큰 위협이 아니었겠지만, 이 곳의 심연 늑대들은 마력 저항이 강해 마법이 잘 통하지 않았다. 순수한 검술로 승부를 봐야 했다.
선두의 늑대가 하준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준은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어둠을 가르는 별을 휘둘러 늑대의 옆구리를 깊숙이 갈랐다. 놈의 신음성과 함께 검은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나머지 놈들은 개의치 않고 더욱 사납게 달려들었다. 이들은 죽음의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하준은 검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때로는 마법이 섞인 주먹을 날리며 늑대들을 상대했다. 그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특히 늑대들이 무는 순간 퍼지는 독은 뼈를 녹이는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팔과 다리에 끔찍한 상처가 생겼다.
“크윽!”
마지막 남은 세 마리의 늑대 중 한 마리가 그의 등 뒤에서 달려들었다. 하준이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갑옷을 찢고 살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힘이 실린 일격에 그의 몸이 바위벽에 내던져졌다. 쾅! 등골을 따라 올라오는 끔찍한 통증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의 눈에 흐릿하게 비친 것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늑대들의 모습이었다. 이제 끝인가. 수많은 던전을 헤쳐 나오며 겪었던 죽음의 위기 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하준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둠 속에서, 칠흑 같은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난 한 줄기 섬광. 길고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빛나는 자안(紫眼)이 번뜩였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력의 창이 늑대들을 꿰뚫었고,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두 마리의 늑대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녹아내렸다.
남은 한 마리의 늑대가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늦었다. 여인은 마치 유령처럼 빠르게 움직여 늑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늑대는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여인의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이윽고 늑대의 몸은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힘에 의해 형체를 잃고 소멸했다.
정적.
하준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압도적인 존재감과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한 명의 그림자 요정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그림자 요정이 아니었다. 그녀의 왕관처럼 빛나는 은발과 등 뒤로 보이는 우아한 날개 흔적은, 그녀가 그림자 요정 중에서도 고귀한 혈통, 즉 ‘어둠의 섭정’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림자 요정.”
하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본능적으로 검을 다시 잡으려 했지만, 온몸의 통증이 그를 붙잡았다.
여인은 하준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인간에 대한 경멸과 호기심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인간 주제에 이 깊은 곳까지. 감히 그림자 영토를 침범한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듣는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네놈은 어째서… 이 곳에 있는가?” 하준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 “심연 늑대들은… 네 부하가 아니었던가?”
여인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렸다.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날 위해 개처럼 짖어대는 놈들은 아니다. 그저 이 곳의 그림자 에너지를 흡수하고 진화한 야만적인 피조물들일 뿐.” 그녀는 하준의 상처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네놈이 무엇이든 간에, 내 영역을 침범한 자들을 청소하는 것은 내 임무다. 방금 그 늑대들은 내 영역을 더럽혔고, 그 대가를 치렀을 뿐.”
그녀의 말에 하준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늑대들을 처치한 것이 자신을 도운 것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녀의 행동에는 인간을 향한 맹목적인 증오보다는, 자신의 질서와 영역을 지키려는 냉정한 의지가 엿보였다.
여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놈의 검술은 제법 볼만하군. 인간치고는.”
하준은 순간 그녀의 칭찬에 당황했다. 그림자 요정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군. 하지만… 목숨을 구해준 것인가? 비록 본의는 아니었더라도.”
여인의 자안이 순간 흔들렸다.
“착각하지 마라. 난 그저 너에게 조금 더 고통을 주기 위한 시간을 벌어주었을 뿐이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 했다.
“잠깐.”
하준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인이 차갑게 뒤돌아봤다.
“이건… 네 것이다.”
하준은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에서 회복 물약을 꺼내 그녀에게 던졌다. 여인은 놀란 듯 손을 들어 물약을 받아냈다. 그녀의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다니.
“무슨 수작이지?” 그녀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수작이라니. 상처 입지 않았나? 아까 늑대의 독에 노출되었을 수도 있고.” 하준은 자신의 어깨에서 피를 흘리는 상처를 꾹 누르며 말했다. “나는 이미 독에 당했지만, 너까지 당할 필요는 없지.”
여인은 물약을 응시했다. 은빛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 인간들이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회복 물약이었다. 그녀의 몸에는 작은 찰과상 정도만 있을 뿐이었지만, 아까의 격렬한 전투로 인한 마력 소모는 컸을 터였다.
그녀는 천천히 마개를 열고, 물약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그녀의 얼굴에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회복 마법과 달리 물약은 마력 소모 없이 즉각적인 효과를 주었다.
“…이런 보잘것없는 것으로 내게 매수하려 드는가?” 그녀는 여전히 경계했지만, 그 말투는 아까보다 미묘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매수라니. 고마움의 표시다. 어쨌든 날 구해주지 않았나. 비록 네가 아니라고 우기겠지만.” 하준은 고통에 살짝 이마를 찡그렸다. “내 이름은 강하준. 너는…?”
여인은 물끄러미 하준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이름.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름을 묻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오랜 침묵 끝에, 그녀의 입에서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셀레네.”
그림자 요정의 언어로 ‘밤의 여왕’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하준은 그 이름에 어울리는 그녀의 고귀하면서도 냉정한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셀레네… 좋은 이름이군.” 하준은 피식 웃었다.
셀레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자안은 여전히 하준을 탐색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경계심은 미묘하게 다른 감정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인간… 감히 자신에게 물약을 건네고, 이름을 묻는 인간이라니. 그녀의 수천 년 삶 속에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기이한 경험이었다.
“다음에 만날 땐, 적이 되겠지.” 셀레네가 낮게 읊조렸다.
“아마도.”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이 곳에서 살아남아야겠지.”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목표는커녕, 이 던전을 빠져나가는 것조차 어려울 터였다. 셀레네는 그런 하준을 잠시 응시하더니, 아무 말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어둠만이 남은 공간에, 하준은 홀로 남겨졌다. 온몸의 통증이 그를 짓눌렀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방금 마주했던 그림자 요정, 셀레네의 잔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냉정함, 그리고… 예상치 못한 작은 온정.
그는 어깨의 상처를 지혈하며 생각했다. 과연 그녀는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꼈을까?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호의를 베푼 인간을 비웃었을까?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그림자 요정도, 서로를 향해 이런 종류의 감정을 가졌던 적은 없었다.
멀리서, 또 다른 인간 탐험대원들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서둘러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종족의 오랜 증오와 단절을 넘어선 어떤 작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균열에서 피어나는 것은, 차가운 심연 속에서 홀로 피어나는 이름 모를 그림자 꽃처럼 위태롭고도 아름다운 무언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