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질척한 늪처럼 세상을 잠식했다. 해가 떠오른 지 한참이건만, 콘크리트 미로 속은 여전히 새벽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희뿌연 안개가 도시의 상처를 가렸지만, 썩어 문드러진 살점과 핏물 섞인 쇠 비린내는 숨길 수 없었다. 이한은 녹슨 철조망 너머로 아스팔트 바닥에 눌어붙은 검붉은 얼룩들을 바라봤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곳 생존자 거점 3호의 순찰조가 ‘그것들’의 잔해를 치웠지만,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오늘도 재수 옴 붙었네.”
등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박 경사가 담배꽁초를 길바닥에 툭 던지며 거칠게 짓밟았다. 그의 얼굴엔 며칠 밤을 새운 듯 피로와 신경질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오늘 내일 하는 세상 아닙니까.”
이한은 피식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 상황에 대한 지독한 냉소가 배어 있었다. 박 경사는 이한의 어깨를 툭 쳤다.
“넌 참 속 편하다, 야. 그래도 우리가 발 뻗고 잠이라도 자는 건, 저 안에 있는 강 반장님 덕분인데.”
강태식 반장. 이 거점 3호를 이끄는 수장이자, 전직 강력계 형사였다. 엄격하고 원칙주의자였지만, 그만큼 생존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인물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곳은 진작 무너졌을 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럼요. 그러니 더더욱 그분을 잃을 수는 없겠죠.”
이한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차가운 이성과 번득이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박 경사는 그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순찰로 향했다. 이한은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였다.
“크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쿵, 하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점 안쪽에서부터 비명과 고함이 뒤섞여 메아리쳤다. 순식간에 정적을 깨고 거점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
이한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비명이 들린 방향, 거점의 중앙 관리동으로 몸을 날렸다.
***
중앙 관리동의 좁은 복도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생존자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웅성거리며 서로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복도 끝, 강태식 반장의 개인 사무실 문 앞에는 몇몇 경비병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지만,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비켜! 대체 무슨 일이야?!”
박 경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장에 도착했다. 그의 뒤를 따른 이한은 마치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침착하게 상황을 스캔했다.
“박 경사님! 큰일 났습니다! 반장님이… 반장님이…!”
경비병 중 하나가 더듬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은 공포와 경악으로 가득했다.
“강 반장님이 왜?!”
“사무실 안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됐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복도에 모여 있던 생존자들 사이에서 거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에게 되묻는 목소리, 이제 어쩌면 좋으냐는 절망 섞인 한숨이 뒤섞였다.
박 경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경비병을 밀치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은 어떻게 열었지? 억지로 부쉈나?”
강태식 반장의 사무실은 거점 내에서도 가장 안전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곳이었다. 철제 문은 이중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고, 안에서는 빗장까지 걸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창문은 아예 없었고, 환기구는 사람 한 명 지나가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좁았다. 외부에서 침입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저희가 억지로 따고 들어갔습니다! 반장님께서 너무 인기척이 없으셔서…”
경비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한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박 경사는 그를 막으려 했지만, 이한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사무실 내부는 침묵과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책상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서류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강태식 반장이 의자에 기댄 채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목에는 시퍼런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질식사였다.
“젠장! 누가… 누가 이런 짓을!”
박 경사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이 절망적인 시대에, 아군끼리 살인이라니. 그것도 가장 중요한 리더를.
이한은 좁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은 강태식의 시체와 흩어진 주변을 훑었다. 핏자국은 없었다. 격렬한 몸싸움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강태식은 마치 저항할 틈도 없이 당한 것 같았다.
이한은 손전등을 꺼내 바닥을 비췄다. 작은 먼지 한 톨, 희미한 발자국, 아주 미세한 흔적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박 경사님.”
이한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이 사무실 문, 안에서 걸어 잠글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하셨죠? 그리고 창문은 없고요.”
“그래! 저 빗장을 봐! 저걸 안에서 걸었다는 건… 외부 침입은 불가능하다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박 경사는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도 강력계 베테랑이었다. 밀실 살인? 이런 시대에 그런 고전적인 트릭이라니.
이한은 핏기 없는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강태식의 굳어버린 시신을 꿰뚫는 듯했다.
“외부 침입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살인자가 이 방에 갇혀 있었다는 말이죠.”
순간, 박 경사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섬뜩한 경악이 스쳤다.
“무슨… 무슨 헛소리야! 그럼 살인자는 아직 이 방에 있다는 거냐? 어디에 숨었다는 거야?!”
경비병들이 총을 바싹 쥐고 주변을 둘러봤다. 좁은 방 안에서 숨을 곳이라곤 책상 뒤나 옷장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마치 강태식의 마지막 숨결까지 추적하는 듯했다.
“아니요. 살인자는 없습니다. 이미 사라졌죠.”
그의 말은 더욱 미궁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넣었다. 강태식의 목에 선명한 살인의 흔적이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살인이 벌어졌고,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그럼에도 살인자는 사라졌다?
이한은 강태식의 시체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밀실 살인’입니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트릭이 숨겨져 있죠.”
혼란에 빠진 생존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한에게로 향했다.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악의가, 그들 코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미스터리 한가운데, 이한이 서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가설과 단서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