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천무제전의 서막

장엄한 비룡산맥의 품에 안긴 천무각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수백 년에 걸쳐 자연석을 깎아 만든 듯한 거대한 광장은, 이제 막 떠오른 붉은 해 아래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찼다. 각 문파의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오색찬란한 무지개를 만들었고, 그 아래에는 저마다의 기개를 뽐내는 무림의 고수들이 운집해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영웅들이 아니었다. 천하의 존망이 걸린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마지막 희망의 불씨들이었다.

천하는 지금, 묵룡의 저주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수년 전, 북방의 심연에서 깨어난 묵룡은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대지를 휩쓸었다. 초목은 시들고, 강물은 말라붙었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감히 그 누구도 묵룡의 막강한 힘에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천지는 죽음의 기운으로 물들어갔다.

절망 속에서 무림의 어르신들은 오랜 전설을 떠올렸다. 오직 천무제전에서 탄생할 ‘천무패(天武牌)’의 주인이, 묵룡의 저주를 봉인하고 천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 그리하여, 전 무림에 격문이 뿌려지고, 천하의 영웅들이 비룡산 천무각으로 모여들게 된 것이었다. 천무패를 차지할 자는 천하의 운명을 짊어질 것이요, 그러지 못할 자는 멸망의 그림자 아래 스러질 것이리라.

광장 한편, 가장자리에 선 유하(柳河)는 이 거대한 광경을 무심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낡고 해진 푸른 도포 자락, 아무렇게나 묶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그는 화려한 비단 옷을 걸치고 저마다의 문파를 상징하는 장신구로 치장한 다른 고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흡사 이 거대한 잔치에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처럼 보였다. 그의 옆을 지나가는 이들은 그를 한낱 구경꾼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유하의 시선은 허공을 가로지르는 고수들의 빛나는 기세를 좇지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이 비무를 통해 얻어야 할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었다. 그것은 천무패의 영광도, 무림 지존의 자리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절박한 그 무언가.

“어이, 거기! 길을 막지 말고 비켜서지 못할까?”

거만한 목소리가 유하의 귓가를 스쳤다. 유하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콧잔등을 치켜세우고 서 있는 젊은 무사가 보였다. 붉은 비단 도포에 허리에는 번쩍이는 혈월검(血月劍)을 찬 그는 누가 봐도 명문세가의 공자임이 분명했다. 혈월검 강호준. 젊은 나이에 이미 강호에 이름을 떨친 촉망받는 인재였다.

“듣자 하니, 천무각 비무는 아무나 참가할 수 있다고 하더군. 덕분에 저런 허접한 것들도 기어들어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강호준은 유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뒤를 따르던 문하생들도 거들며 킬킬거렸다. 유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술과 흔들림 없는 눈빛. 그의 무반응에 오히려 강호준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진 듯했다.

“흥, 감히 나 강호준의 면전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겠다? 명심해라, 애송이. 천무제전은 너 같은 잡배들이 꿈꿀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저 이 천지가 어떻게 구원받는지 지켜나 보거라.”

강호준은 픽 웃고는 유하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유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만이 아주 미세하게 일렁였을 뿐이었다. 마치 강물 위에 비친 달빛처럼, 흔들리는 듯 보였으나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어깨를 친 강호준의 손끝에서 아주 짧은 순간, 마치 번개에 감전된 듯한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강호준조차도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라 여겼을 뿐.

그때, 거대한 종소리가 광장을 진동시켰다. 웅성거리던 인파는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이내, 천무각의 가장 높은 누각에서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운대사(白雲大師), 천무각의 최고 어른이자 무림 전체가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비룡산 위로 떠오르던 해는 정수리에 걸려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조용하라!”

백운대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웅성거림을 단번에 잠재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연륜과 함께, 세상을 짊어진 자의 무거운 고뇌가 담겨 있었다.

“천무제전에 모인 무림의 영웅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단순한 영광이 아닌, 천하의 존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이 자리에 섰다!”

백운대사의 시선이 광장을 가득 메운 고수들을 한 명 한 명 훑었다. 그의 눈길이 유하를 스치는 듯했지만, 이내 다른 이들에게로 향했다. 유하는 그저 조용히 백운대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묵룡의 그림자는 이미 우리의 발밑까지 드리워졌다. 그 어둠이 대지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전에, 우리는 빛을 찾아야 한다. 천무패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다. 그것은 천하의 기운을 모아 묵룡을 봉인할 열쇠이자, 동시에 희생과 고통을 감내할 자에게만 허락되는 운명의 증표다.”

백운대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엄숙해졌다.

“이제, 천무제전의 서막이 열렸다. 진정한 영웅이여, 그대들의 무를 펼쳐라! 천하의 운명을 걸고, 묵룡의 저주를 끊어낼 단 한 명의 전사를 뽑는 대회가 시작될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이 천지를 울리자, 광장은 열광의 함성으로 터져 나갔다. 수많은 고수들이 각자의 무기를 치켜세우며 환호했고, 그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모두가 영웅이 되기를 꿈꾸며, 천무패의 영광을 상상했다.

하지만 유하는 그 함성 속에서 홀로 조용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환호나 흥분 대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림자는 묵룡의 저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그림자 속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유하 자신만의 사명과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이 대회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천하를 구원할 빛이 될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인가. 유하는 차가운 손으로 품속에 숨겨둔 낡은 목걸이를 만졌다. 천무제전의 막이 올랐다. 그리고 유하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