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는 아홉 시 뉴스 시작과 함께 현관문을 열었다. 몸에 밴 습관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구두를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13층, 1307호. 서울의 흔한 고층 아파트 중 하나. 오늘도 역시, 지독하게 평범한 하루였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서 미세한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을, 그날의 정우는 알지 못했다.
거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정우는 손을 뻗어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전등이 켜지는 순간, 그는 찰나의 이질감을 느꼈다. 스위치를 누르는 자신의 손과 전등이 켜지는 시간 사이에 아주 미세한 간극이 생긴 듯한 착각. 마치 현실이 한 박자 느리게 따라오는 것 같았다. 피곤 탓이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를 꺼냈다. 맥주 캔을 따는 순간, 주방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이 ‘짤그랑’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살짝 움직였다. 정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바람인가?”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층이라 진동에 민감한가 싶어 바닥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컵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아파트는 침묵 속으로 잠겼다. 정우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였다. 벽 너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드득… 드드득…’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벽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처음엔 위층이나 옆집 소음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소리는 점차 명확해졌다. 규칙적인 리듬도, 특정한 방향도 없었다. 그저 벽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뼈를 긁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
정우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귀를 벽에 대자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분명, 벽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지?” 쥐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공사 소리라기엔 너무 불규칙하며, 무엇보다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그는 스탠드를 켜고 벽을 유심히 살폈다.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소리는 이내 잦아들었지만, 그의 등골에는 묘한 오한이 감돌았다.
다음 날, 기이한 일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출근 준비를 하던 정우는 거울 앞에서 칫솔을 들고 있었다. 세면대 위에는 칫솔꽂이와 비누, 그리고 작은 유리병에 담긴 가습기가 놓여 있었다. 그 순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아주 잠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가습기 안의 물이 ‘첨벙’ 소리를 내며 위로 솟구쳤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병을 흔든 것처럼.
정우는 숨을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가습기를 만졌다. 차갑고 단단했다. 다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자신의 눈은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정우는 현관에 놓인 신발들이 묘하게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 가지런히 정리해두던 신발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특히 한쪽은 굽이 바닥을 향해 뒤집혀 있었다. 그는 피로에 지쳐 짜증이 났다. “누가 장난치나?” 아파트 보안은 철저했다. 외부인 침입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는 거실로 들어섰다. 책상 위, 어제 밤 잠시 읽다 덮어둔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도 그가 읽던 페이지가 아니라, 전혀 다른 페이지에. 그는 책을 덮어두었던 분명한 기억이 있었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한가?”
밤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정우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CCTV를 설치해야겠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홈 보안 업체를 검색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검색하던 중,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화면이 갑자기 일렁였다. 글자들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흐물거렸다. 그리고 이내 화면 전체가 검게 변하더니, 잠시 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작은 파동이 화면을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젠장.” 정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피로나 착각으로 돌릴 수 없었다. 그의 아파트에, 아니 그의 공간에, 무언가 이질적인 존재가 침투했음이 분명했다.
며칠 후, 정우는 거실 한구석에 작은 CCTV 두 대를 설치했다. 움직임 감지 기능과 야간 투시 기능이 있는 최신 모델이었다. 그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증거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날 밤의 기록은 그를 더욱 깊은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다.
새벽 2시 17분. 거실 전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짧은 간격으로,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장난스럽게 껐다 켰다 하는 것처럼.
새벽 2시 25분. 소파 위에 놓여 있던 쿠션 하나가 느릿하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섬뜩할 정도로 느리게. 그러더니 이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벽 2시 38분. 그의 침실 문이 저절로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CCTV는 어둠 속의 침실 내부를 비추었지만, 아무것도 포착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는 각도가 너무나 인위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안에서 밀어 연 것처럼.
정우는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그는 손에 식은땀을 쥐었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는 현상들. 그는 경찰에 신고할까 생각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제 집에 유령이 나타나요.’ 아니면 ‘물건들이 저절로 움직여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폴터가이스트’, ‘심령 현상’, ‘귀신’ 같은 키워드들을 검색했다. 수많은 뜬소문과 과학적 해명들 속에서, 그는 하나의 글을 발견했다.
「특정 공간에서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에너지 왜곡 현상. 단순한 유령과는 다르다. 이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현실에 간섭하려 할 때 나타나는 징후일 수 있다. 인간의 오감을 넘어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그림자…」
정우의 등골이 오싹했다. 다른 차원의 존재?
그날부터 아파트는 그에게 낯선 공간이 되었다. 공기는 무거웠고, 벽에서는 여전히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 소리는 단순한 긁힘이 아니었다. 때로는 물이 젖은 듯한 ‘철벅’거리는 소리가 섞였고, 때로는 얇은 막이 찢어지는 듯한 ‘즈즈적’ 소리가 들렸다. 마치 벽 안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분열하고, 혹은 자라고 있는 것처럼.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달그락.’ 이번에는 주방이었다. 그는 슬며시 침대에서 내려와 복도로 향했다. 복도 끝, 주방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불빛? 아니었다. 주방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에 감싸여 있었다. 형광등 빛이 아니었다. 마치 어딘가 깊은 심해에서 올라온 듯한, 차갑고 신비로운 빛.
그는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발을 들였다. 식탁 위에는 그가 아끼던 도자기 컵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컵의 형태가 이상했다. 컵의 손잡이가 마치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고, 컵의 몸체는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진흙으로 컵을 만들다 만 것처럼. 그는 손을 뻗어 컵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컵이 갑자기 ‘퍼석’ 소리를 내며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잿가루 같은 미세한 입자들만 남았다. 컵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정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소리는 목구멍 속에서 컥하고 막혔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현실이, 그의 이성이 허용하는 모든 범주를 넘어섰다.
그는 비틀거리며 거실로 돌아왔다. CCTV 화면은 여전히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화면 속 거실은 평소와 달랐다. 소파의 등받이가 어깨 높이까지 솟아올라 있었고, 벽에 걸린 시계는 숫자판이 뒤집힌 채로 거꾸로 돌고 있었다. 마치 공간 자체가 흐물거리는 유기체처럼 변형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 거실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정우는 확신했다. 자신이 방금 본 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아파트가, 이 공간이 점차 현실의 형태를 잃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조였다.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 밤, 정우는 잠들지 못하고 새벽까지 홀로 앉아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심장은 광란하듯 뛰었다. 문득, 거실의 한구석에서 희미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책상 아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움찔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하지만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마치 끈적하고 어두운 액체가 살아있는 듯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천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니, 형태를 갖추려 애쓰는 듯했다. 그것은 웅크린 자세로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검고 축축한 촉수들이 서로 엉겨 붙고, 갈라지고, 다시 합쳐지는 것을 반복했다. 정우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현실의 법칙을 거스르는 기괴한 생명체가, 아니 *무언가*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깊은 심해의 생명체와 거대한 곤충,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도형이 뒤섞인 듯한 모습이었다. 표면은 끈적거렸고,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는 듯했다. 그 존재에게서는 어떠한 시선이나 의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우의 귓가에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어떤 언어의 체계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데 뒤섞여, 의미 없이 웅웅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그의 뇌를 긁어내리는 듯했고, 그의 이성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니, 감을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은 그 존재에게 묶인 듯, 끔찍한 광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존재는 서서히 정우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듯했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탐색하려는 것처럼.
그때, 거실 전체가 ‘쿵’ 하고 울렸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진동. 천장의 전등이 쉴 새 없이 깜빡거리더니, 이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아파트는 다시 암흑에 잠겼다. 하지만 정우의 눈에는 여전히 그 존재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끈적이는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망쳐야 했다. 살아야 했다. 그는 현관문으로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바닥이 더 이상 평평하지 않다는 것을. 그의 발밑에서, 마루판이 마치 부드러운 살덩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하지만 돌리려는 순간, 손잡이의 금속이 마치 녹는 것처럼 부드러워졌다. 손가락이 미끄러지며, 손잡이는 기이하게 휘어졌다. 열리지 않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아니, 문이 *갇혀 있었다*.
정우는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열어! 열라고!” 그의 목소리는 절규가 되었다. 하지만 벽은 답이 없었다. 오히려 벽 안쪽에서, 그 끈적이는 마찰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드드득… 철벅… 즈즈적…’ 이제는 그 소리가 그의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그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아까 그 존재가 있던 자리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다시 번지고 있었다. 그 빛은 점차 강해지며, 어둠 속에서 존재의 실루엣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정우를 향해.
정우는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서,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거실의 벽면이 마치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천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비현실적인 빛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의 귀에는 수만 개의 비명이 한꺼번에 들리는 듯한 환청이 울려 퍼졌다.
그는 절규했다. 하지만 그의 절규는 빛과 소음 속에 파묻혔다.
그 존재는 마침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피부를 스쳤다. 그는 감각을 잃어갔다. 시야가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존재의 몸체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촉수들이 그의 몸을 감싸 안으려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1307호 아파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 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공기가 평소와는 묘하게 다르다는 것. 어떤 이들은 쇠 비린내가 났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오래된 먼지 냄새 같았다고 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형언할 수 없는 *부재*의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1307호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누구도 그곳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혹은 무엇이 깨어나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밤이 깊은 새벽에 그 아파트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듣곤 했다.
‘드드득… 철벅… 즈즈적…’
마치 벽 안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분열하고, 혹은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 소리는 여전히 서울의 밤하늘 아래, 1307호 아파트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