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흙먼지가 맨발에 들러붙었다. 새벽 공기는 뼈를 시리게 할 만큼 날카로웠지만, 이안의 몸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눈앞의 밭고랑은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처럼 보였다. 낡은 괭이가 억센 흙을 파고들 때마다 어깨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이곳은 가상현실 게임, <엘더리아 연대기> 속 ‘푸른 들판 마을’.
그리고 이안은, 이 광활한 세계의 수많은 플레이어 중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 중 하나인 평범한 농부였다.
[퀘스트: 농작물 수확 (0/100)]
[남은 시간: 12시간 34분]
[보상: 제국 통행세 공제, 약간의 경험치, 10골드]
이안은 습관처럼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시스템 창에는 오늘 수확해야 할 채소 목록과 남은 식량, 그리고 어제 대장간에서 얻은 무딘 괭이 하나가 전부였다. 10골드. 그게 오늘 하루 뼈 빠지게 일한 대가였다. 그마저도 제국 통행세로 대부분 사라질 금액이었다.
“젠장.”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밭 옆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물에 얼굴을 씻어내자 한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엘더리아 연대기>는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풀 내음, 흙의 감촉, 바람 소리, 그리고 고통까지도. 가상현실 기술의 정점이라 불리는 이 게임은 ‘완벽한 몰입감’을 자랑했고, 그 완벽함은 이안 같은 최하층민에게는 더 큰 현실의 무게로 다가왔다.
멀리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크로노스 제국의 수도, ‘황금성’이 있는 방향이었다. 저곳은 온갖 진귀한 보물과 마법, 그리고 강대한 권력이 모인 곳이리라. 반면 푸른 들판 마을은 제국의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그저 세금을 바치고 병사들을 징집당하는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일 뿐이었다.
“이안! 벌써부터 그렇게 일하면 나중에 퍼질 거야!”
옆 밭에서 농작물을 매던 민철이 너스레를 떨었다. 민철은 이안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였다. 이 게임 속에서도 둘은 여전히 변함없는 처지였다.
“너처럼 꾀부리다가는 오늘 할당량을 못 채운다고, 바보야.”
이안이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민철은 푸른 들판 마을에서 손꼽히는 건장한 청년이었지만, 그 역시 제국이 매긴 높은 세율과 강도 높은 노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나저나, 오늘 세금 걷으러 온다는 소문이 돌던데.” 민철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벌써? 지난달에 걷어가지 않았나?” 이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랬지. 근데, 제국 영주가 바뀌면서 새 영주가 취임 선물이라며 추가 세금을 매겼다는군. 병사들이 몇 명이나 오는지 봤어?”
“아니, 나는 새벽부터 밭에 나와 있어서…”
이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을 입구 쪽에서 웅장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순찰대라고 하기에는 소리가 너무나도 요란하고 육중했다. 이안과 민철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붉은 망토를 두른 제국 병사들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선두에는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을 타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두툼한 장부를 든 관리인이 따라붙었다. 병사들의 수효는 열 명이 훌쩍 넘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푸른 들판 마을 주민들은 모두 광장으로 모여라! 새로 부임하신 엘리엇 영주님의 은총이 너희에게 닿았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을지어다!”
관리인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은총’이라는 단어가 이안의 귓가에는 조롱처럼 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일하던 손을 멈추고 하나둘 광장으로 향했다. 모두의 얼굴에는 체념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아이들은 부모의 치맛자락을 잡고 숨었고, 노인들은 닳아빠진 지팡이에 몸을 기댔다. 기사는 말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은 채 위압적으로 마을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엘리엇 영주님의 명이다!” 관리인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달부터 모든 가구는 기존 세금 외에 추가로 ‘황제의 만수무강 기원금’을 납부해야 한다! 금액은 각 가구의 수확량에 비례하며…!”
웅성거림이 점차 거세졌다.
“만수무강 기원금이라니! 말도 안 돼!”
“우리 수확량이 얼마나 된다고 또 세금을 걷는단 말인가!”
“지난달 세금도 겨우 냈는데…!”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불만은 목소리뿐이었다. 감히 제국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반항할 용기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닥쳐라!” 기사가 버럭 소리쳤다. 그의 말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에 광장이 일순 조용해졌다. “황제 폐하의 은혜로운 통치에 감히 불만을 품는 자는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당장 추가 세금을 내지 못하는 가구는 노역장으로 보내질 것이다!”
노역장.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노역장에 끌려간 이들은 대부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돌아온다 해도 평생 노동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폐인이 되어 있었다.
이안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시스템 창에 뜨는 ’10골드’라는 숫자가 유난히 작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 들린 괭이가 아니라, 차라리 창이나 검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늙은 할머니 한 분이 앞으로 비틀거리며 나섰다. 평생 굽은 허리로 밭만 갈아온, 이안의 이웃이었다.
“나으리… 제발… 제 손자들은 아직 어린데… 이 늙은이 혼자서는… 더 이상 낼 돈이 없습니다…”
할머니는 손을 비비며 애원했다. 기사는 콧방귀를 뀌며 할머니를 내려다봤다.
“노약자라고 예외는 없다! 법은 만인에게 공평한 법! 당장 물러서라!”
기사가 손을 휙 내젓자, 병사 두 명이 할머니에게 다가섰다. 할머니는 그들의 거친 손길에 휘청거렸다. 이안의 눈앞이 붉어졌다.
[경고: 명성치 하락 위험!]
[경고: 제국 병사와의 적대행위 시도 시 치명적인 결과 초래!]
시스템 메시지가 경고했지만, 이안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때 민철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안! 안 돼! 제국 병사들이랑 싸워봤자 우리만 손해잖아! 그냥… 그냥 참는 수밖에 없어!”
민철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안은 민철의 손을 뿌리쳤다.
“더 이상 못 참아.”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광장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제국 병사들도, 기사도,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이안의 눈빛에는 그동안 억눌렸던 분노와 좌절, 그리고 새로운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숙명처럼 주어진 농부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 썩어빠진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은 불씨라도 기꺼이 되어주리라.
광장 건너편, 낡은 여관의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이안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후드를 깊게 눌러써 가려져 있었지만, 이안을 향한 그의 시선은 깊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낡았지만 잘 관리된 단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안은 병사들에게 붙잡힌 할머니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퀘스트: 평민의 저항 (숨겨진 퀘스트)]
[내용: 크로노스 제국의 부패에 맞서 작은 저항의 불씨를 지펴라. 당신의 용기는 많은 이들의 희망이 될 것이다.]
[난이도: ??? (매우 높음)]
[성공 조건: (???)]
[보상: (???) 실패 시: 사망 또는 영구적인 저주]
[이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이안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에 ‘수락’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