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여명
카이의 발걸음은 잿빛 황무지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닳아 해진 장화가 딛는 곳마다 먼지가 푹, 하고 튀어 올랐다. 하늘은 늘 그랬듯이 두터운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해는 보이지 않았다. 낮도 밤도 아닌 영원한 황혼, 그것이 이 세계의 전부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그 희미한 빛 아래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감사해야 했다.
축축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딘가 물이 고인 곳이 있다는 증거였다. 카이는 망자의 숲 가장자리를 따라 걷고 있었다. 숲이라기보다는 고목들의 무덤에 가까웠다. 앙상한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듯 뻗어 있었고, 그 사이로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어쩌면 살아남는 데 필요한 고대의 유물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젠장, 오늘도 아무것도 없군.”
카이는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목은 칼칼했고, 물통 바닥에는 흙탕물 한 모금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지막 식량인 말린 육포 한 조각도 어제 다 먹어버렸다. 오늘은 반드시 뭔가를 찾아야 했다. 아니면…
그는 허리춤에 찬 낡은 단검을 만졌다. 유일한 친구이자 생존의 보루. 다른 한 손으로는 목에 걸린 작은 펜던트를 쥐었다. 녹슨 철 조각처럼 보였지만, 손에 닿으면 희미하게 온기를 품는 이상한 돌이었다. 오래전, 폐허가 된 도시의 도서관 잔해에서 우연히 주운 것이었다. 이따금 미약한 빛을 발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왠지 모를 위안을 받았다.
발밑의 흙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카이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는 녹회색 이끼가 듬성듬성 퍼져 있었고, 그 사이로 물방울이 맺힌 버섯들이 보였다. 회색 버섯. 독성은 없지만 맛도 없는, 그저 허기를 채울 뿐인 존재.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귀한 식량이었다.
카이가 버섯을 조심스럽게 캐내려 몸을 숙이는 순간이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냉기가 흘렀다. 직감. 수없이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 생존자의 직감이었다.
그는 미동도 없이 숨을 죽였다. 바람은 없었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있었다. 망자의 숲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숲은 그 자체로 죽음의 침묵을 품고 있었으니까.
먼지 낀 황무지 바닥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는 길고 앙상했으며, 사람의 형상을 닮았지만 훨씬 더 기괴했다. 그리고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마치 주변의 어둠에 스며들려는 듯 미끄러지듯이.
어둠 추적자. 망자의 숲에서 살육을 일삼는 존재. 희미한 온기와 소리에도 반응하며 먹잇감을 추적하는 그림자 괴물이었다. 카이는 숨을 멈췄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은 마치 광폭한 북처럼 울려 퍼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림자는 이미 자신을 감지했을 것이다.
카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돌멩이를 움켜쥐었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그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은 황무지 너머,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낸 고대 마법사의 탑이었다. 그곳은 위험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유일한 피난처가 될 수도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 끈적한 어둠이 자신을 뒤쫓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 없는 추격이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오직 앞만을 보며 달렸다. 폐허가 된 건축물 잔해들을 뛰어넘고, 갈라진 바닥을 헤치며 나아갔다.
마침내 탑의 그림자가 훨씬 더 가까워졌다. 굳건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폐허의 모습이었다. 뾰족한 첨탑은 이미 무너져 내린 지 오래였고, 벽 곳곳에는 커다란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카이는 무너진 아치형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쿨럭, 쿨럭. 폐에서 쇳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쓰러지듯 탑 내부로 진입했다. 탑 안은 황무지보다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곳.
“하아… 하아…”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땀이 비 오듯 흘렀고, 눈앞이 아찔했다. 그는 천천히 단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 희미한 잿빛 햇살이 부딪혀 섬광을 일으켰다.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카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림자. 아니, 어둠 추적자였다.
그것은 탑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림자가 형태를 갖춘 듯, 검고 앙상한 몸은 공허함 그 자체였다. 키는 일반 성인 남자의 두 배는 족히 될 법했다. 가느다란 팔다리는 기이할 정도로 길게 뻗어 있었고, 그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리고 가장 섬뜩한 것은, 그 얼굴이었다. 얼굴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두 개의 붉은 점만이 빛나는 공허한 어둠이었다. 마치 심연에서 솟아난 악몽 같았다.
“크르르…”
짐승의 울음소리와는 달랐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긁어내는 듯한, 뼈를 깎는 듯한 마찰음이었다. 그 소리에 탑 내부의 먼지가 부르르 떨었다.
카이는 뒤로 물러섰다. 탑 내부는 넓었지만, 도망칠 곳은 마땅치 않았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제단 같은 것이 놓여 있었고,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먼지와 잔해가 가득한 곳이었다.
어둠 추적자가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다가왔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카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싸워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에서 녹슨 쇳덩이 몇 개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탑 내부에 흩뿌려진 잔해들 사이로 던졌다. 쨍그랑! 쨍그랑! 쇳조각이 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둠 추적자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붉은 눈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하는 듯했다. 이들은 소리와 열에 민감했다.
그 틈을 타 카이는 제단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 쓸만한 것이 없을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너진 벽면의 돌무더기였다. 탑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이거다!”
카이는 다시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어둠 추적자의 반대편에 있는 벽면을 향해 힘껏 던졌다. 쾅! 돌멩이가 벽에 부딪히며 먼지가 피어 올랐다.
추적자가 다시 소리 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바로 그때였다. 카이는 제단 뒤편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전력으로 벽면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낡은 벽은 그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먼지와 돌무더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어둠 추적자는 갑작스러운 붕괴에 휘청거렸다. 붉은 눈이 혼란스러운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이는 무너진 벽 뒤편, 어둠 속으로 이어진 작은 통로를 발견했다. 폐허가 된 탑 안의 또 다른 폐허. 이곳은 아마도 오래전 마법사들이 사용하던 비밀 통로였을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통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비좁은 통로는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위에서는 아직도 돌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어둠 추적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통로 안으로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놈이 통로를 따라 올 수는 없을 것이다. 몸집이 너무 컸다. 하지만 놈은 끈질겼다. 언젠가 이 위로 다시 올라가려면 놈과 다시 마주해야 할 터였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가슴팍이 욱신거렸다. 돌무더기 틈으로 몸을 던질 때 아마도 긁힌 모양이었다. 아픔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일단 살았다.
아래로 향하는 통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이따금 벽에 부딪혀 희미한 빛을 내는 펜던트가 유일한 길잡이였다. 통로가 끝나고, 그의 발밑에 단단한 바닥이 닿았다. 더 넓은 공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손에 든 펜던트를 들어 올리자, 희미한 빛이 주위를 밝혔다. 거대한 원형의 방이었다. 낡은 책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구슬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고대의 도서관, 혹은 마법 실험실이었을지도 모를 곳.
카이의 시선은 책장 한구석에 굴러떨어진 작은 파편에 닿았다. 펜던트와 똑같은 재질의 돌 조각이었다. 그것은 펜던트보다 훨씬 더 선명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웠다. 손에 닿자마자,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도시, 푸른 하늘, 웃음소리… 그리고 엄청난 파괴의 불길. 짧고 강렬한 기억의 파편이었다.
“이건… 대체…”
그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 파편은 단순한 돌 조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망자의 숲에서 어둠 추적자를 피해 도망쳐 온 곳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고대의 유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카이는 파편을 품에 안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위에서는 아직도 희미하게 어둠 추적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이곳은 안전할까? 이 유물은 그에게 무엇을 알려줄까?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파편이 그의 손에서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미지의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황폐해진 세계에서, 그의 생존기는 이제 막 새로운 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