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은 새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쨍한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거실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스물아홉, 첫 자가 아파트. 대출과 씨름하며 얻어낸 독립 공간은 그녀에게 안도감과 함께 작은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갓 페인트를 칠한 듯한 벽지와 반짝이는 마루, 그리고 고요한 공기마저 완벽했다. 이 도시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기쁨에 그녀는 어깨춤이라도 출 것 같았다.
짐 정리로 분주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되었다. 향긋한 커피 내음이 아파트 가득 퍼지고, 창밖으로는 활기찬 도시의 아침이 펼쳐졌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화로웠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사건은 아주 사소하게 시작되었다. 이사 온 지 며칠 후, 서윤이 설거지를 마치고 컵을 건조대에 올려두는 순간이었다. 분명 방금 깨끗하게 닦아 올려놓은 머그컵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싱크대 안으로 ‘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서윤은 눈을 비볐다. “피곤한가 보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컵을 다시 주워 올렸다. 덜 마른 손으로 만져서 미끄러졌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다.
며칠 밤을 더 지새우고 나자, 작은 이상 현상들은 점차 횟수를 늘려갔다. 밤에는 희미한 소리가 그녀의 잠을 방해했다. 낡은 건물이라 그런가, 아니면 위층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인가. 그녀는 이따금씩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귀 기울였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거나 주변 소음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한밤중에도 냉장고가 ‘웅’ 하고 켜지는 소리, 보일러가 갑자기 작동하는 소리, 아니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똑, 똑’ 하는 물방울 소리. 현대 아파트가 내는 흔한 소음이라고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였다.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철렁했다. 마치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진 듯한 소리였다. 그녀는 잠시 숨을 죽이고 귀 기울였지만, 이내 모든 소리가 멎었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불을 켜보니,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책 몇 권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분명 똑바로 쌓아두었던 책들이었다. “고양이도 없는데… 바람이 불었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서윤은 이제 더 이상 제정신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었다.
아침에 분명 닫아두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밤새도록 잠금장치가 걸려 있던 현관문이 잠금 해제되어 있었다. 잠금쇠가 ‘찰칵’ 소리를 내며 풀려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등골이 오싹했다. 화장실 불이 저절로 켜지고 꺼지는 건 예사였다. 가장 소름 끼쳤던 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탁상시계가 침대 아래로 떨어져 시침이 부러져 있었다는 점이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서윤은 점점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집 안의 모든 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시시때때로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 아무도 없는데도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 갔다. 피곤함은 극에 달했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예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야, 너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환청 듣는 거 아니야? 아니면 그냥 층간 소음 같은 거겠지. 잠시 이사 후유증이야.”
돌아오는 건 무관심하거나, 혹은 걱정하는 듯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반응뿐이었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봤지만, ‘아파트에 귀신이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원인을 알 수 없는 오작동이 잦다’고 얼버무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전기 점검을 해보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기계적인 답변뿐이었다. 그들은 서윤의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는 다른 공간이 되어갔다. 더 이상 그녀만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거실의 에어컨이 한여름의 한기를 뿜어내듯 갑자기 작동했고, 주방의 칼들이 하나둘 싱크대 위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지어 서윤이 가장 아끼던 화분들이 난간에서 떨어져 바닥에 뒹굴며 흙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방구석에 웅크렸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제발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냉장고 문이 ‘쾅!’ 하고 열리고 닫히는 소리, 거실 테이블이 ‘드르륵’ 하고 거칠게 끌리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여기는… 내 자리야…”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분명히 들렸다. 차갑고, 습기 찬, 그리고 극도로 분노에 찬 목소리. 마치 수십 년간 억눌려 있던 한이 터져 나오는 듯한 절규였다. 서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벽에 기대어 몸을 떨던 그녀의 눈에 문득 거실 벽이 들어왔다. 그곳에는, 붉은색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마치 피로 쓴 듯한, 축축하고 불길한 글씨.
‘죽어.’
그리고는 온 집 안의 가구들이, 마치 중력을 잃은 듯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책상, 의자, 소파, 심지어 육중한 냉장고까지도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렸다. 아파트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서윤은 비명을 지르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잡고 필사적으로 돌렸다. 잠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발로 차도 견고하게 닫힌 채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막고 있는 것처럼.
그때, 뒤에서 차가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살을 파고드는 듯한 감각.
서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저항할 힘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그녀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턱 끝까지 차오른 비명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복도에서는 이웃 주민이 무심하게 지나가는 발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들의 평온한 삶 속에서 서윤의 아파트는 그저 굳게 닫힌, 평범한 한 칸의 문일 뿐이었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서윤의 흔적은, 그 어떤 이웃에게도, 또 그 어떤 관리사무소 직원에게도 기억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로 이사 올 이들을 기다리는, 고요하고 싸늘한 아파트만이 남겨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다시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그 아파트의 거실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듯이 조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