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달이 드리운 숲은 영원한 황혼에 갇힌 듯했다. 나뭇가지들은 서로 뒤엉켜 하늘을 가렸고, 땅에는 축축한 이끼와 이름 모를 어둠 속 식물들이 뒤덮여 있었다. 칼날 같은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기사의 갑옷 아래에서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었다. 엘리안은 두꺼운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미며 숲의 깊은 곳을 응시했다. 이 금지된 만남이 벌써 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매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죄책감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인간 왕국에서 그는 ‘어둠의 심장을 꿰뚫는 자’라 불리는 성기사단의 맹장이었다. 그의 검은 그림자 종족, 즉 나이트본과의 오랜 전쟁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 쥐인 것은 전투를 위한 검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감춘 작은 약초 꾸러미였다. 숲의 기운이 더욱 싸늘해지자, 엘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지 않는 것인가. 아니, 올 것이다. 릴리아는 항상 약속을 지켰다. 비록 그 약속이, 이 세계의 모든 규칙과 신념을 배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정적을 찢는 듯한 나뭇가지 밟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어둠이 짙어지는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한 줄기 푸른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숲의 정령이라도 되는 양, 릴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뜨린 흑단 같은 머리카락, 새벽 별처럼 빛나는 푸른 눈,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듯한 창백한 피부. 나이트본 특유의 날카롭지만 유려한 이목구비는 그녀의 존재를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늦었군, 기사.”
그녀의 목소리는 숲의 바람 소리처럼 낮고 부드러웠으나, 듣는 이의 심장을 저릿하게 울리는 힘이 있었다. 엘리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순찰이 길어져서.”
그는 변명했지만, 사실은 그녀에게 오는 길 내내 망설임과 두려움에 시달린 탓이 컸다. 이 순간, 그는 성기사단의 맹장이 아니라, 단지 금지된 마법에 홀린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었다.
릴리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숲 속의 덩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아니. 네가 망설인다는 걸 알아. 매번 그렇듯이.”
엘리안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늘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인간이고, 너는 나이트본이다. 우리는 수천 년을 싸워온 적대 관계다.”
그의 말에 릴리아의 입술에 옅은 비소가 떠올랐다.
“그래. 적대 관계. 그래서 너희는 우리를 악마라 부르고, 우리는 너희를 탐욕스러운 침략자라 부르지. 이 끝없는 전쟁 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 자체가 죄악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엘리안은 말없이 품속의 약초 꾸러미를 내밀었다.
“상처는… 좀 어떤가? 지난번 네가 준 약은 효험이 있었다.”
그녀는 지난번 인간과의 교전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인간의 약초를 필요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치료법이 나이트본의 어둠 마법보다 특정 상처에 더 효과적일 때도 있었다.
릴리아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으나, 이내 약초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엘리안의 손등에 스치자, 차가운 감촉이 전율처럼 퍼졌다. 마치 얼음과 불이 만난 듯한 이질감.
“네 약초는 나쁘지 않아. 하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을 거야. 오히려… 더 격렬해질 것이다.”
그녀의 말에 엘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이지? 최근 우리 쪽에서도 나이트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릴리아는 숲의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푸른 눈이 잠시 섬광처럼 빛났다.
“우리 쪽에서도 인간들의 교만한 깃발이 더욱 깊숙이 침범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림자 장막이 찢기고, 고대의 봉인들이 흔들리고 있어. 대족장님은 더 이상 후퇴는 없다고 선언하셨다. 이제… 전면전이 임박했다.”
엘리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전면전. 그 단어는 곧 자신과 릴리아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눠야 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럴 리가… 아직은 휴전 기간이었다… 아니, 비공식적인 정전 상태였지.”
“인간의 휴전이란 늘 그렇듯이, 다음 공격을 위한 준비 기간일 뿐이었다. 네 왕의 탐욕은 그림자 숲의 뿌리까지 마르게 할 것이다.” 릴리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뿌리 깊은 증오와 절망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한때 불타오르던 강렬함 대신, 체념에 가까운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엘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자신의 왕과 자신의 종족이 완벽하게 정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나이트본의 땅에 눈독을 들이고, 그들의 자원을 탐하며, 이교도라며 그들을 말살하려 했다. 그는 지난번 전투에서 어린 나이트본 전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섬뜩한 괴물이 아니라, 고통스러워하는 또 다른 생명체였다.
“나는… 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다.”
엘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기사로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종족의 승리를 기원해야 할 그가, 적대 종족의 여인 앞에서 종전(終戰)을 바라고 있었다.
릴리아는 다시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 엘리안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전쟁은 끝나지 않아, 엘리안. 숲이 말라붙고, 피가 강을 이루고, 모든 영혼이 고통 속에서 절규할 때까지는.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운명이다.”
그녀는 한 발자국 엘리안에게 다가섰다. 차가운 숲의 공기 속에서,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낯선 향기가 엘리안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나이트본의 마법처럼, 그를 서서히 잠식하는 듯한 향기였다.
“너와 내가… 같은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불경한 일인지 아는가? 우리는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존재다. 너의 신념은 나를 악마라 부르고, 나의 선조들은 너희를 파괴자로 저주했다.”
“하지만… 난 너를 악마라 부르지 않아. 단 한 번도.” 엘리안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릴리아는 그보다 먼저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그것이 너의 약점이다, 기사. 나를 약하게 만든다. 너는 나이트본의 피를 묻힌 검을 들고도, 나의 눈에서 고통을 읽으려 했다. 너는… 바보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릴리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가면 아래로, 엘리안은 미묘한 감정의 파고를 읽어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금지된 만남이 가져올 파멸적인 결과를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이 밤은… 곧 끝날 거야. 그리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 서로를 죽일 방법을 모색해야 할 테지.” 릴리아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다음번 만남은… 적군과 아군으로, 칼날을 맞대고 이루어질지도 모르지.”
엘리안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얇은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그 안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렇게는 안 돼… 릴리아. 나는… 너와 싸우지 않을 거야.”
릴리아의 입가에 다시 한번 슬픈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전쟁은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너는 너의 왕을 위해, 나는 나의 대족장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려야 할 운명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엘리안의 시선과 뒤섞였다. 그 짧은 순간, 시간은 멈춘 듯했다. 숲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그들 두 사람의 존재만이 세상에 남은 듯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종족을 뛰어넘는 갈망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죄책감과 사랑,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겨진 영혼의 비명이었다.
릴리아는 갑자기 그의 뺨에 차가운 손을 댔다. 그녀의 눈에서 푸른 빛이 더욱 강하게 빛났다.
“만약… 만약 다음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릴리아는 엘리안에게 몸을 기댔다. 차가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짧고도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얼어붙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동시에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순된 감각이 엘리안을 휩쓸었다. 그의 이성적 사고가 일순간 마비되었다. 모든 금기와 상식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숨결이 섞이고, 짧은 탄식이 숲 속에 울렸다. 그리고 곧, 릴리아는 엘리안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으나, 그 안에는 묘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잊지 마, 엘리안. 이 숲은 모든 것을 기억할 거야. 우리의 금지된 만남, 우리의 어리석은 희망,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운명까지.”
그녀는 마치 연기처럼 숲 속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오직 차가운 숲의 바람만이 그곳을 스쳐 지나갔다. 엘리안은 홀로 남겨졌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고, 릴리아의 차가운 입술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하늘의 핏빛 달은 여전히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엘리안은 주저앉아 젖은 흙바닥에 주먹을 박았다.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들의 사랑은 이 거대한 비극 속에서 결국 짓밟히고 말 것인가?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단지, 곧 다가올 폭풍 속에서, 자신이 릴리아를 향해 검을 겨누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만이 그의 심장을 가득 채웠다. 그는 묵직한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미고, 차가운 숲을 빠져나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나이트본의 전함 소리가, 마치 그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