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고, 서울의 불빛은 언제나처럼 이 도시의 어두운 속내를 감추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네온사인이 길게 늘어붙었고, 그 빛은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태한의 동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낡고 허름한 건물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스물다섯, 한때는 이 도시의 어둠을 지배하던 ‘그림자 파벌’의 후계자로 불렸던 강태한. 하지만 이제 그는 그저 어둠 속을 떠도는 그림자 그 자체였다.
“지혁….”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온 이름은 가시 박힌 칼날처럼 그의 목을 긁었다. 유.지.혁. 세 글자가 그의 전신에 새겨진 끔찍한 문신처럼 타들어갔다. 3년 전, 그 이름은 그에게 세상의 전부였고, 가장 믿었던 친구였다. 아니, 형제나 다름없었다. 함께 위험을 헤쳐나가고, 서로의 등을 맡기며 싸워왔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의 배신으로 산산조각 났다.
그날의 악몽은 아직도 생생했다. 지하 깊은 곳, 태한의 힘의 원천이 잠들어 있던 ‘영원의 심장’ 의식. 지혁은 태한이 힘을 흡수하는 가장 취약한 순간, 등 뒤에서 칼날을 꽂아 넣었다. 물리적인 칼이 아니었다. 심장을 찢는 배신의 마력,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탐욕의 주문이었다. 태한은 그때 영원의 심장과 함께 그의 존재 자체가 붕괴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을 때, 그의 몸에는 영원의 심장이 부여하는 강력한 힘 대신, 저주와도 같은 그림자만이 휘감겨 있었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파괴였다.
“그때부터였지. 내가 괴물이 된 건.”
태한의 손끝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단순히 어둠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모든 존재의 근원을 잠식하는 심연의 그림자.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그것은 태한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었다. 그의 새로운 힘이었다. 영원의 심장을 통해 얻어야 했을 순수한 힘 대신, 배신과 절망 속에서 태어난 변형된 힘. 순백의 빛은 검은 암흑으로 뒤틀렸지만, 그 파괴력은 이전보다 더욱 잔혹하고 예측 불가능했다.
저 아래,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된 ‘아카데미움 타워’가 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그곳은 지금 유지혁의 본거지였다. 태한의 그림자 파벌을 무너뜨리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지혁은, 3년 만에 이 도시의 가장 강력한 초능력자 집단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야.”
태한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어둠의 기운이 춤을 추었다. 복수를 위한 첫걸음. 정면 돌파는 어리석은 짓이다. 아직은 아니다. 그는 지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의 약점을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오늘, 지혁이 아카데미움 타워 최상층에서 비밀스러운 회합을 가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회합의 목적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태한의 감은 그것이 지혁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시도일 것이라고 속삭였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태한의 검은 코트를 휘감았다. 그는 옥상 난간에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공중으로 몸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아올라 그의 몸을 감쌌다. 그림자는 마치 유기체처럼 그의 몸에 달라붙어 빠른 속도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건물의 외벽을 타고 흐르는 그림자는 어둠 속에 완벽히 녹아들어 그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었다.
27층. 목표 지점까지 불과 몇 층 남지 않았다. 그는 통기구 틈새로 그림자 촉수를 밀어 넣어 내부의 상황을 살폈다. 복도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감시 카메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일반인이 아니었다. 이능력을 사용하는 자들, 일명 ‘각성자’들. 지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쓸 만한 패를 많이 모아두었을 터였다.
태한은 복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을 포착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잠시 후, 경호원들의 발밑에서 솟아오른 두 개의 그림자 칼날이 그들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남자는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그들의 정신력은 그림자 칼날에 의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태한은 굳이 그들을 죽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직은.
“시끄럽게 굴지 마.”
그림자 속에서 태한의 형체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차갑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쓰러진 경호원들의 몸에서 키 카드를 빼내어 문을 열었다. 안쪽은 복잡한 서버실이었다. 수많은 모니터들이 빛을 뿜어내며 복도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모든 감시 시스템이 제어되는 듯했다.
태한은 망설임 없이 가장 큰 중앙 서버에 손을 댔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기운이 서버 속으로 침투했다. 삑, 삑, 삑. 서버실 내부의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침입자다!”
갑자기 서버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서너 명의 각성자들이 난입했다. 그들은 총 대신 마력을 머금은 주먹과 발을 휘두르거나, 손에서 번개를 뿜어내는 등의 이능력을 사용했다. 일반 총기는 이능력자들에게 거의 효과가 없었으므로, 이곳 경비는 철저히 각성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딜 감히 개미 주제에…!”
가장 먼저 달려든 남자가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바위를 뭉쳐 놓은 듯한 단단한 주먹이었다. 태한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한순간 검은 안개로 변하자,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태한의 형체는 남자의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그림자로 만든 예리한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너희 따위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림자 칼날은 남자의 어깨를 깊숙이 베었다. 고통에 찬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남자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태한은 나머지 각성자들에게 그림자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그림자처럼 유연하게 움직였지만, 닿는 순간 온몸의 기력을 빨아들이는 끔찍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채찍에 맞은 각성자들은 마치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 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눈은 점점 희미해졌다. 태한의 그림자 힘은 생체 에너지를 흡수하는 잔혹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이, 서버에 침투했던 그림자 기운이 작업을 마쳤다. 태한의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펼쳐진 데이터가 보였다. 지혁의 오늘 회합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아크라이트 심장과의 계약 마무리…]**
**[…‘고대 룬 문자’ 기반 봉인 해제식…]**
**[…‘세계의 균형’ 통제권 확보…]**
“아크라이트 심장… 세계의 균형?”
태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혁은 단순한 권력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도시를 넘어선, 더 거대한 것을 획득하려 하고 있었다. ‘세계의 균형’이라니. 그건 고대 신화에나 등장하는, 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힘의 근원이 아닌가. 지혁은 그때 자신에게서 빼앗은 영원의 심장을 통해 이미 막대한 힘을 얻었을 텐데, 그보다 더한 것을 탐하고 있었다.
“역시 네놈은 변함이 없군. 언제나 더 높은 곳을 갈망하는 탐욕스러운 짐승.”
데이터를 모두 복사하자마자 태한은 미련 없이 서버실을 나섰다. 경비 시스템은 이미 태한이 손을 쓴 대로 혼란에 빠져버렸다. 경고음은 더욱 요란해졌고, 이곳저곳에서 각성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한은 복도를 따라 최상층으로 향했다. 발소리 하나 없이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흡사 유령 같았다. 쿵, 쿵, 쿵.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지혁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그리고 그를 향한 끓어오르는 증오 때문이었다.
최상층의 유리문 너머로 회의실 내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커다란 원탁 주위에 앉아 있는 몇몇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정중앙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얼굴. 유지혁이었다. 3년 전보다 더 위압적이고, 더 차가워진 얼굴. 그의 눈에는 성공한 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태한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등 뒤에서, 섬뜩한 감각이 솟아났다.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혁의 목소리였다. 그가 아직 문 너머에 있는데도, 지혁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었다. 태한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지혁의 감각도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예민해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영원의 심장으로부터 얻은 힘이 그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태한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놈과 정면으로 부딪히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게다가 이 안에 지혁 외에도 다른 강자들이 몇몇 앉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태한은 지혁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찰나의 그림자를 던졌다. 그림자는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지혁의 바로 앞, 테이블 위에 닿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한 송이의 검은 꽃으로 변했다. 어둠의 마력이 응축된, 생명 없는 꽃. 태한의 새로운 표식이었다.
“이게 뭐지…!”
회의실 안에서 지혁의 목소리가 당황과 분노로 뒤섞여 터져 나왔다. 검은 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지혁은 손을 뻗어 꽃을 만지려 했지만,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꽃은 검은 안개가 되어 스르륵 사라졌다. 그 안개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지혁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_곧 만나게 될 거야, 지혁._
그 목소리는 지혁의 심장을 꿰뚫는 비수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태한은 이미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아카데미움 타워의 가장 높은 층에서, 지혁의 분노에 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강태한! 네놈이 살아있었단 말이냐…!”
태한은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다시 잠겼다. 그의 심장은 고요한 늪처럼 침묵했지만, 그 안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지혁의 계획을 알아냈다. 그리고 지혁에게 자신의 귀환을 알렸다. 이제 시작이었다.
_어둠은 그림자를 낳고, 그림자는 복수를 부른다._
강태한의 그림자가 흩뿌려진 서울의 밤하늘 아래, 붉은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