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라는 숨을 들이쉬었다. 낡은 공기 필터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 코를 찌르는 퀴퀴한 냄새가 필터를 뚫고 들어왔다. 지하 50층,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심연(アビス)’ 구역이었다. 머리 위로는 수십 킬로미터를 솟아오른 제국의 첨탑들이 보이지 않는 장막 너머에서 빛나고 있을 터였다. 이곳은 그런 빛이 닿지 않는, 오직 그림자만이 지배하는 영역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새라. 냄새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아도, 아직 우린 살아있는 숨을 쉬고 있잖아.”
나지막한 카이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검게 물든 작업복 위로 전술 조끼를 걸친 그는 흡사 그림자 속의 유령 같았다. 새라는 그의 말대로 숨을 고르려 노력했지만,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첫 임무였다. 단순히 정보 수집이나 암호 해독이 아닌, 직접 제국의 심장부에 발을 들이는. 비록 그 심장이 가장 썩어 문드러진 바닥일지라도.
“그럼요, 카이님. 하지만 이 냄새는… 썩은 금속이랑 뭔가 다른 게 섞인 것 같아요.”
카이가 픽 웃었다. “그게 바로 심연의 향기지. 재활용되지 못하고 버려진 모든 것들의 잔해. 그리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체념.”
그들의 발밑에서는 삐걱거리는 금속 보드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좁고 습한 통로는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녹슨 파이프에서는 정체 모를 액체가 똑똑 떨어졌고, 전선 다발은 제멋대로 엉켜 마치 거대한 괴물의 내장 같았다. 이곳의 주민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 짐승처럼 살았다. 제국이 남긴 찌꺼기로 연명하며, 한때 찬란했던 문명의 그림자 아래 갇힌 채.
“목표 지점까지 앞으로 200미터. 경비 드론 셋, 순찰 경로 확인. 감시탑은 좌측 상단에 하나.”
카이의 귀에 꽂힌 소형 통신장치에서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계적이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아직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새라는 리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작은 체구에 항상 데이터 패드를 손에 쥐고 있던, 세상 모든 코드를 해독할 수 있을 것 같은 천재 해커.
“확인. 진은?” 카이가 물었다.
“진 오빠는 이미 선행 진입 완료. 입구 경비병 둘은 조용히 처리했다고 합니다. 카이 오빠, 시간 없어요. 제국의 강철 기사들이 이 구역으로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잡혔어요. 아무래도… 누군가 신고한 것 같아요.”
리사의 목소리에 긴박함이 서렸다. 새라의 심장이 다시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강철 기사. 제국의 최정예 병사들. 그들의 강화 슈트는 어떤 공격도 막아내고, 그들의 무기는 한 발로 사람의 형체를 지울 수 있었다. 심연의 주민들에게 강철 기사는 죽음과 동의어였다.
“젠장. 예상보다 빠르군. 새라, 준비됐나?” 카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자동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무겁고 둔탁한 감촉이 오히려 그녀를 진정시키는 듯했다.
“네, 카이님.”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이 심연의 바닥에서, 제국의 눈을 멀게 할 작은 불꽃을.”
그들은 어둠 속으로 더욱 깊이 발걸음을 옮겼다.
***
목표는 한때 제국의 행정 전산망의 일부였던 오래된 데이터 저장고였다. 붕괴된 통신 시스템과 낡은 보안망 덕분에 그나마 접근이 가능했다. 진이 이미 처리한 경비병들의 흔적을 따라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습기 먹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에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낡은 컴퓨터 서버들이 웅웅거리는 소리만 냈다.
“좌측 두 번째 서버 랙, 하단 포트에 접속해. 리사가 보낸 코드를 입력하면 돼.” 카이가 지시했다.
새라는 재빨리 움직였다. 긴 손가락으로 끈적이는 먼지를 걷어내고 포트에 소형 데이터 인터페이스를 연결했다. 그녀의 눈앞에 홀로그램 패널이 떠올랐다. 리사가 전송한 해킹 코드가 번개처럼 화면을 채웠다. 복잡한 알고리즘이 순식간에 제국의 방화벽을 뚫고 지나갔다.
“접속 완료! 데이터 추출 중… 예상 시간 3분.” 리사의 목소리에 희미한 환희가 깃들어 있었다.
“3분 안에 강철 기사들이 도착할 거야.” 진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는 입구 쪽을 경계하며 묵묵히 서 있었다. 그의 등에는 육중한 개량형 산탄총이 걸려 있었다.
2분 40초.
2분 30초.
새라는 초조하게 시계를 응시했다. 이 데이터에는 제국이 최하층 구역에 공급하는 전력과 물, 그리고 식량의 할당량을 조작한 흔적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표면적으로는 공정한 분배를 외치는 제국의 위선이 드러날 터였다. 작은 반란의 불씨라도 지필 수 있는 귀중한 정보였다.
그때, 철문 밖에서 둔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콰앙!’
강철 기사들의 강화 슈트가 뿜어내는 충격음이었다. 철문이 순식간에 찌그러들기 시작했다.
“젠장! 벌써 도착했어!” 카이가 이를 악물었다. “리사, 얼마나 남았지?”
“20초! 15초! 거의 다 됐어요!” 리사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콰드득!’
철문이 완전히 뜯겨나가고, 육중한 강철 기사 두 명이 섬뜩한 붉은 눈을 번뜩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손에는 에너지 라이플이 들려 있었다.
“움직임을 멈춰라. 제국의 법에 따라 반역자들을 체포한다.” 기계음이 울렸다.
“진!” 카이가 외쳤다.
진은 망설임 없이 산탄총을 뽑아 들었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첫 번째 강철 기사의 어깨 보호대가 박살 났다. 하지만 강화 슈트는 끄떡도 없었다. 기사는 곧바로 에너지 라이플을 발사했고, 진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피했다. 에너지 탄환이 벽에 박히자 주변 회로들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터져 나갔다.
“새라! 어서!” 카이가 새라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5초! 4초! 완료! 데이터 추출 완료했어요!” 리사의 환호성이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새라는 데이터 인터페이스를 뽑아 들고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자, 이제 도망칠 시간이다!” 카이가 소리쳤다.
진은 강철 기사들의 시선을 붙들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었다. 그의 산탄총은 한계가 명확했다. 강화 슈트에 유효타를 입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공격하며 기사들의 발을 묶었다.
“진! 이쪽이야!” 카이가 다른 통로를 향해 외쳤다.
진은 기사 한 명의 다리에 총을 쏴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게 한 뒤, 카이와 새라가 뛰어간 통로로 몸을 날렸다. 강철 기사들의 추격이 바로 뒤를 이었다. 발소리가 지하 통로를 진동시켰다.
***
좁고 어두운 통로를 셋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강철 기사들의 기계적인 발소리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새라의 폐가 터질 것 같았다. 다리는 납덩이처럼 무거웠지만,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잡히면 끝이었다. 제국의 지하 감옥은 살아있는 지옥보다 더 끔찍한 곳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쪽이야!” 리사의 목소리가 통신망에서 갈라졌다. “좌측 좁은 환풍구! 강철 기사들은 못 들어갈 거예요!”
카이는 망설임 없이 리사가 지시한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녹슨 철제 계단을 두 칸씩 뛰어내려가자, 성인 한 명이 겨우 기어들어갈 만한 좁은 환풍구가 보였다. 진이 먼저 몸을 쑤셔 넣었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녹슨 철골에 긁히며 ‘끼이익’ 하는 소리를 냈다.
“빨리!”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라가 그 다음으로 몸을 집어넣으려 하자, 뒤에서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강철 기사들이 진입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에너지 라이플로 주변을 부수는 소리였다. 파편들이 튀어 올랐다.
“젠장!” 카이가 새라를 밀어 넣고 자신도 몸을 구겨 넣었다.
환풍구 안은 먼지와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시야는 거의 확보되지 않았고, 기어가는 동안 좁은 통로가 내는 금속 마찰음이 귀를 찢을 듯했다. 새라는 이대로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여기까진 못 들어오겠지….” 새라가 겨우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들어오진 못해도… 환풍구를 막을 순 있을 겁니다.” 리사의 목소리에 우려가 담겨 있었다. “그럼 산소 공급이 중단될 거예요.”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희미한 빛이 보였다. 출구였다. 진이 필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기어갔다. 카이와 새라도 그를 따랐다. 마침내 흙먼지가 가득한 바닥으로 진이 먼저 떨어져 내렸다. 이어서 카이가, 그리고 새라가 나왔다.
그들이 빠져나온 곳은 버려진 지하 하수 처리장이었다. 거대한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썩은 물이 고여 악취를 풍겼다. 하지만 강철 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휴… 살았다.” 새라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카이는 주변을 경계하며 통신장치에 대고 말했다. “리사, 강철 기사들 움직임은?”
“추적 포기. 아마 다른 구역으로 이동했을 거예요. 데이터는 무사한가요?”
새라가 허리춤에서 인터페이스를 꺼내들었다. 작은 기기 안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네, 무사해요.”
“잘했어, 새라.” 카이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에도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우린 해냈어.”
진은 묵묵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작은 긁힌 상처가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에 익숙한 베테랑이었다.
“이제 본거지로 돌아가서 이 데이터를 분석해야겠군.” 카이가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다시금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이것이 제국의 가면을 벗길 첫 번째 단서가 될 것이다.”
***
버려진 하수 처리장에서 한 시간가량 더 이동한 끝에, 그들은 ‘둥지(Nest)’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비밀 기지에 도착했다. 낡은 지하철역의 폐쇄된 구간을 개조한 곳이었다. 입구는 정교한 홀로그램 위장막으로 가려져 있었고, 내부에는 기본적인 생활 시설과 함께 정교한 해킹 장비들로 가득 찬 리사의 작업실이 있었다.
“왔어요, 오빠들! 새라 언니!” 리사가 데이터 패드를 들고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인터페이스를 향하고 있었다. “빨리 데이터 이리 주세요! 흥미로운 부분이 너무 많아서 벌써 손이 근질거려요!”
새라가 인터페이스를 리사에게 건네자, 그녀는 빛의 속도로 그것을 자신의 메인 서버에 연결했다. 홀로그램 화면들이 튀어 오르고, 복잡한 코드들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리사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이런… 이런 제기랄!” 리사가 갑자기 욕설을 뱉었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 미친 제국 놈들! 최하층 구역에 할당된 물과 식량 배급량을 무려 70%나 조작하고 있었어요! 그것도 지난 5년 동안!”
카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진은 묵묵히 벽에 기대어 있었지만, 그의 주먹은 이미 굳게 쥐어져 있었다. 새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가렸다. 70%라니. 그것은 최하층 구역 주민들의 생존을 완전히 무시한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괜히 심연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쓰러지는 게 아니었다. 제국의 풍요로운 상층 구역과는 전혀 다른 지옥이었다.
“70%… 이 빌어먹을 자식들.” 카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이 정보가 공개되면….”
“공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리사가 홀로그램 화면을 손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이 데이터는 그저 증거일 뿐이에요. 제국은 이런 걸로는 꿈쩍도 하지 않아요.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말을 믿고, 우리의 외침을 그저 짐승들의 울부짖음으로 치부할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지?” 새라가 물었다. 그녀는 아직 이 모든 잔혹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카이가 리사의 어깨를 짚었다. “리사의 말이 맞아. 단순한 폭로만으로는 부족해. 우리는 이 데이터를 이용해서, 그들의 시스템에 직접적인 타격을 줘야 해.”
“시스템에 타격이라니… 어떻게 말이에요?” 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제국에는 ‘생체 인식 통합 관리 시스템’이라는 게 있어. 모든 시민의 정보, 자원 할당량, 심지어 사고 기록까지 전부 관리하는 거대한 신경망이지.” 리사가 설명했다. “만약 우리가 이 조작된 데이터를 이 시스템의 핵심부에 직접 주입한다면….”
“그들의 통계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건가?” 카이가 리사의 말을 이었다.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자신들의 ‘정의로운’ 이미지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거지.”
“그 이상이에요, 오빠.” 리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스템이 교란되면, 상층 구역의 자원 분배에도 오류가 생길 거예요.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을 목도하게 될 겁니다. 혼란이 커지면…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무시할 수 없을 거예요.”
새라는 리사의 설명을 들으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를 빼내는 것을 넘어, 제국의 근간을 흔들겠다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반란. 혁명. 어렴풋이 머릿속에만 있던 단어들이 이제 현실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럼… 다음 목표는 그 시스템에 침투하는 건가?” 진이 물었다.
카이는 데이터가 번개처럼 흘러가는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심연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작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래. 이 썩어빠진 제국을 무너뜨리려면, 더 깊숙이 파고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거야.” 카이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보다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새라는 카이의 옆에 서서, 그가 바라보는 홀로그램 화면을 함께 바라봤다. 화면 속의 수많은 데이터와 숫자들은 그녀에게는 복잡한 암호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제국에 갇혀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을 바꿀 수 있는 희망의 불씨가.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아닌, 강렬한 열망으로.
“준비됐어요, 카이님.” 새라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권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향한 강렬한 의지로 굳게 쥐어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