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위로, 핏빛으로 물든 노을이 쏟아져 내렸다. 녹슨 철근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고층 빌딩들은 거대한 무덤의 비석 같았고, 바람은 그 사이를 헤집으며 죽음의 찬가를 불렀다. 강태혁은 찢어진 후드티를 더욱 바싹 여몄다. 낡고 해진 천 조각이 그의 마른 몸을 겨우 감싸고 있었지만, 살을 에는 듯한 늦가을의 한기는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눈은 살아남은 모든 생명체가 경계해야 할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 움푹 들어간 두 눈 아래로는 검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거칠게 부르튼 입술은 한 달 넘게 웃음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채였다. 며칠째 제대로 된 한 끼를 입에 대지 못해 위장은 쥐어짜는 듯 아파왔고, 갈증은 목구멍을 사막처럼 메마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복수심. 오직 그것만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삐걱거리는 발걸음으로 폐허가 된 상가 건물을 헤치며 나아갔다. 유리 파편이 흩뿌려진 바닥을 조심스럽게 디디며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녹슬고 날카롭게 변형된 쇠파이프였다. 한때는 건축 현장에서 쓰였을 평범한 도구였지만, 이제는 그의 유일한 생명줄이자 벗이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군.”
태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어둡고 먼지 쌓인 선반들 위에는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남은 게 있다면 다른 생존자나 변이체들의 몫이 되었을 테니,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절망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지만, 곧이어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얼굴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재하.
그 이름 석 자는 태혁의 뇌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는 낙인과 같았다. 믿었다. 아니, 믿었다고 생각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겼다.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등을 맞댔던 전우이자,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것을 공유했던 둘도 없는 친구. 그에게 기꺼이 심장을 내어줄 수 있다고 믿었던 존재.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환상이었다. 무너져 내린 세상보다 더 잔인하게 그의 등을 꿰뚫었던 칼날은, 다름 아닌 이재하의 손에 들려 있었다.
*“미안하다, 태혁아.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야.”*
그때 들었던 재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금 선명하게 울렸다. ‘우리 모두’라니. 그따위 명분으로 나를 버리고, 내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심장이 다시금 욱신거렸다. 그날의 피비린내와 절규, 그리고 자신을 짓밟고 일어서던 재하의 차가운 눈빛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태혁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과거에 붙잡혀 있을 시간은 없었다. 복수. 그것만이 그의 목표이자 삶의 이유였다. 이재하를 찾아내, 그가 자신에게 안겨준 고통의 백 배, 천 배를 되갚아줄 때까지는 죽을 수도 없었다.
텅 빈 건물을 벗어나 다시 거리로 나섰을 때, 희미하게 들려오는 낮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익숙한 소리였다. 이 황폐한 세계를 지배하는 수많은 위협 중 하나. 변이체.
거대한 쓰레기 더미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은 굶주린 늑대와 개의 중간쯤 되는 형상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머리, 곳곳에 얼룩진 검붉은 털, 그리고 빛나는 듯한 녹색 눈동자. 입가에는 하얀 거품이 묻어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난 채였다. 소위 ‘하급 사냥꾼’이라 불리는 변이체였다. 한 마리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지만, 약해진 자신에게는 충분히 치명적일 수 있었다.
“하필 지금이냐…”
태혁은 쇠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정신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놈이 달려들었다.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변이체의 발톱이 그의 옆구리를 스쳤다.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들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피하면 기회가 없었다. 공격을 흘려내며 온몸의 무게를 실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변이체의 머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크르륵, 하는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변이체가 주춤거렸다. 하지만 놈은 끈질겼다. 다시 한번 태혁에게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사납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이었다. 태혁은 간신히 공격을 피하며 균형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낡은 운동화가 부서진 파편 위에서 미끄러졌다. 위험했다.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쓰러진 버스 잔해였다.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버스 옆면을 박차고 올라섰다. 변이체가 그의 뒤를 쫓아 점프했지만, 태혁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놈의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힘을 모아 쇠파이프를 놈의 옆구리에 꽂아 넣었다.
꿰뚫는 소리와 함께 변이체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녀석의 몸이 경련했고,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태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버스 잔해 위에서 내려왔다. 옆구리에서는 따뜻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에 피로가 더해졌다. 그는 힘겹게 주저앉았다. 고통과 허기,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지독한 현실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어.”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둠이 완전히 깔리기 전, 숨을 곳이라도 찾아야 했다. 폐허 속을 비틀거리며 걷던 그의 눈에 한때 번화가였을 법한 거대한 지하철역 입구가 들어왔다. 무너진 에스컬레이터와 먼지 쌓인 안내판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지상보다는 안전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에 그는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역 내부는 예상대로 어두컴컴했고, 곳곳에 쌓인 잔해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낡은 전동차 잔해가 찌그러진 채 서 있었고, 플랫폼은 언제 멈췄는지 모를 시각에 멈춰버린 듯한 시계탑 아래에서 잠들어 있었다. 태혁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삐끗하며 넘어질 뻔한 그가 겨우 중심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쓰레기와 흙먼지로 뒤덮인 구석, 낡은 배낭이 찢어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여느 때처럼 별 기대 없이 배낭을 뒤져본 그는, 이내 손에 잡힌 물건에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손때 묻은 무전기.
낡았지만 제법 견고해 보이는 군용 무전기였다. 액정은 깨져 있었지만, 버튼들은 멀쩡해 보였다. 태혁은 조심스럽게 무전기를 켜봤다. 희미하게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그 액정 한편에 새겨진 닳아빠진 문양.
매.
날개를 펼친 매의 형상. 아크(Ark)였다. 한때 그와 재하가 속했던 생존자 집단의 상징. 태혁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무전기 하단에는 몇 개의 주파수가 미리 설정되어 있었고, 그 중 하나에는 손글씨로 조악하게 쓰인 글자가 있었다.
‘거점’.
거점. 재하가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고 세력을 확장하던 그곳. 배신당한 후, 태혁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넓은 폐허 속에서 그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이 낡은 무전기는 하나의 단서이자, 희미한 빛이었다. 재하의 흔적을, 그 놈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희망의 실마리.
태혁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피로와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는 광기에 가까운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복수의 불꽃으로 활활 타올랐다.
“찾았다… 이재하.”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속에는 맹세와도 같은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네 놈은 내가 보낸 지옥에서만… 평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낡은 무전기를 꽉 움켜쥔 태혁의 손에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그의 심장은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그림자는 무너진 세상의 한 조각처럼 길고 어둡게 늘어져 있었다.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