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들이쉬자 퀴퀴한 흙먼지와 눅진 곰팡이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온통 잿빛으로 물든 하늘과,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빌딩의 잔해들이었다. 손목을 살짝 들어 올리자, 시야 한구석에 투명한 UI창이 떠올랐다.
[민준 (레벨 3)]
[체력: 23/100]
[허기: 8%]
[갈증: 12%]
[장비: 낡은 단검, 헤진 작업복]
이 지긋지긋한 ‘잿빛 새벽’에 접속한 지 벌써 며칠째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현실에서의 시간은 고작 서너 시간이었겠지만, 가상현실 속에서 민준이 겪은 시간은 며칠, 어쩌면 몇 주에 가까웠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피로감은 현실과 다를 바 없었고, 바닥을 기는 허기와 갈증은 온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젠장, 또 굶어야겠네.”
민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제 간신히 찾아낸 통조림 한 캔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했다. 이제는 그마저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널브러진 철근 더미와 무너진 콘크리트 조각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예리하게 주변을 훑었다. 이곳은 폐허가 된 도시의 외곽이었다. 중앙으로 갈수록 위험은 커지지만, 동시에 더 나은 보급품을 찾을 확률도 높아졌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난, 기이하게 뒤틀린 덩굴식물들이 빌딩 잔해를 휘감고 있었다. 저 덩굴은 때때로 독성을 품고 있거나, 작은 변이체들을 품고 있기도 했다. 민준은 바닥에 떨어진 쇠 파이프를 주워들고 낡은 단검과 함께 양손에 쥐었다. 전투는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찾아오기도 했다.
한참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민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멀리 떨어진 상가 건물 잔해 속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단순히 다른 생존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한 치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았다. 같은 플레이어라 할지라도, 배고픔과 갈증에 미쳐버린 자들은 언제든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었다.
민준은 폐차 더미 뒤에 몸을 숨기고 상가 건물 내부를 응시했다. 무너진 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였다. 사람의 형상보다는 좀 더 크고, 사족보행을 하는 듯했다.
‘변이체인가?’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낮은 레벨의 변이체라면 상대해 볼 만했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강한 녀석이라면 지금의 체력과 장비로는 승산이 없었다. 그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접근했다. 상가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천장에서 쏟아지는 먼지 섞인 햇살이 내부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은 털이 다 빠지고 피부가 울퉁불퉁하게 변형된 개과 변이체였다. 녀석은 쓰러진 진열장 옆에 웅크리고 앉아, 부패한 고기 조각을 뜯어먹고 있었다. 그 순간 민준의 시선이 고기 조각 너머에 놓인 작은 배낭에 꽂혔다.
‘식량…!’
녀석의 레벨은 7. 민준보다 4레벨이나 높았다. 하지만 배낭 안의 식량은 그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았다. 민준은 잠시 고민했다. 도망칠까? 아니, 도망쳐도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언젠가 맞서 싸워야 할 운명이었다.
“크르르르…”
민준의 발소리에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이빨이 잔뜩 드러난 입에서 짐승 같은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녀석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민준은 낮게 읊조리며 쇠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녀석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어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녀석의 발톱이 스쳐 지나간 벽에 깊은 자국이 남았다. 위험했다.
그는 녀석의 뒤를 잡는 데 성공했다. 쇠 파이프를 휘둘러 녀석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이 휘청거렸다.
[변이체 (레벨 7)에게 27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녀석은 곧바로 몸을 회복하고 다시 민준에게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민준의 낡은 작업복 소매를 물어뜯었다.
[체력 -5]
아픔이 느껴졌다. 가상현실 속 통증은 현실의 그것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녀석을 밀쳐냈다. 그리고 그 순간, 옆구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젠장, 이것 때문에 죽는다고?”
민준은 녀석이 다시 덤벼드는 순간, 몸을 숙여 녀석의 복부를 찔렀다. 단검이 깊숙이 박히자, 녀석의 몸이 경련했다.
[변이체 (레벨 7)에게 치명타! 5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끼잉…!”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민준은 단검을 다시 한 번 찔러 넣어 녀석의 숨통을 끊었다.
[변이체 (레벨 7)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획득: 50]
[민준의 레벨이 4로 상승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소폭 상승합니다.]
[체력: 53/100]
레벨업의 효과로 체력이 조금 회복되었지만, 온몸은 여전히 쑤셨다. 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녀석의 시체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배낭을 열어젖혔다. 캔 통조림 2개, 낡은 수통, 그리고 식별 불가능한 씨앗 몇 개.
“이게 얼마 만이야…!”
민준은 수통을 들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깨끗한 물은 아니었지만, 더럽지도 않았다. 한 모금 마시자 갈증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상가 건물 입구 쪽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단검을 쥐고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누가 들어오는 거지? 설마… 다른 플레이어?
“젠장, 소리 듣고 온 건가.”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온 것은 민준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였다. 그녀는 등 뒤에 꽤 큼직한 배낭을 메고 있었고, 한 손에는 녹슨 엽총을 들고 있었다. 다른 손에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손전등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민준이 쓰러뜨린 변이체의 시체를 향했다.
“이런… 벌써 처리했네.”
여자는 살짝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고, 이내 민준이 숨어있는 폐차 뒤편으로 향했다.
“거기 숨어있는 거 다 알아. 나와.”
민준은 그녀의 목소리에 놀랐다. 예상보다 훨씬 예리한 감각이었다. 어설프게 버티는 것보다 나은 선택은 없다고 판단한 민준은 천천히 몸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꽤 능숙한 솜씨네. 레벨은 얼마야?” 여자가 엽총을 내리고 물었다. 그녀의 표정은 경계심으로 가득했지만,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은.
“레벨 4. 당신은?”
“레벨 7. 세라라고 해.”
그녀의 레벨은 방금 민준이 쓰러뜨린 변이체와 같았다. 그녀는 민준의 손에 들린 단검과 쇠 파이프를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꽤나 고생했겠네. 녀석, 보통 끈질긴 게 아니거든.”
“당신은 왜 여기에?” 민준이 물었다.
“보급품 찾으러 왔지. 이 근방에는 이제 씨가 말랐거든.” 그녀는 변이체의 시체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시체는 내가 가져갈게. 고기는 쓸만하니까.”
“나는 배낭을 얻었으니 시체는 당신이 가져가도 상관없어.” 민준은 말했다. 어차피 이 변이체의 고기는 그의 낡은 단검으로는 제대로 해체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세라는 민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배낭에서 해체용 칼과 휴대용 버너를 꺼내 변이체의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 솜씨가 제법 능숙했다.
“혹시… 괜찮다면 팀을 짜지 않을래?” 민준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세라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그녀는 민준을 힐끗 보더니 다시 작업에 집중했다. “이유는?”
“혼자서는 한계가 있어. 식량도, 정보도, 그리고 위험도. 같이 있으면 좀 더 나은 생존 확률을 가질 수 있을 거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는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해서.” 세라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폐건물, 저곳은 분명 위험한 곳이야. 하지만 동시에 가장 좋은 보급품이 있을 만한 곳이기도 하고.” 민준은 상가 건물 너머로 보이는, 유독 높게 솟아 있는 폐빌딩을 가리켰다. “혼자서는 저곳에 진입하는 것조차 힘들 거야.”
세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해체를 마친 변이체의 고기를 배낭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녀의 배낭은 꽤 빵빵해 보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고민의 흔적이 역력했다.
“좋아.”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단 같이 움직여보지. 하지만 약속해. 뒤통수치는 짓은 절대 하지 마. 난 그런 짓 하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아.” 그녀의 눈빛은 살벌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임시적인 동맹이었지만, 이 황폐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남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그럼 저쪽 폐빌딩으로 가볼까.” 세라가 엽총을 다시 고쳐 잡았다. “어차피 이 근처는 더 이상 뒤질 것도 없어.”
민준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잿빛 하늘 아래, 두 개의 그림자가 폐허가 된 도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의 앞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은 함께였고, 그것만으로도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점이었다.
잿빛 새벽은 계속될 터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새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