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숨결

대륙을 뒤덮은 천룡 제국의 위세는 비단 수도의 화려한 궁궐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그림자는 가장 메마르고 척박한 땅, 백성들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잿빛 계곡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이곳, 잿골 마을은 그런 그림자 아래에서 간신히 숨을 이어가는 수많은 마을 중 하나였다.

볕은 뜨거웠지만, 대지는 온기를 머금기보다 사막처럼 갈라져 있었다. 땀으로 얼룩진 삼베옷을 입은 백성들은 굽은 허리를 들어 올릴 새도 없이 하루 종일 흙을 파고 곡식을 심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제국의 수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비켜라, 비켜! 황제 폐하의 명이시다!”

마른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제국 호위 무사들의 말발굽 소리는, 잿골 마을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전령처럼 들렸다. 번쩍이는 흑철 갑옷은 햇빛을 반사하며 눈을 찔렀고, 허리에 찬 검집에서는 서슬 퍼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선봉에 선 자는 비만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체구를 가진 중년의 무사, ‘악취’라는 별명으로 악명 높은 사령관 강묵이었다. 그는 코밑을 스치는 냄새마저 역겹다는 듯 손으로 코를 가리며 마을 어귀를 훑어보았다.

“젠장, 이놈의 촌구석은 올 때마다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군.” 강묵이 낄낄거렸다. 그의 옆에 선 젊은 호위 무사들이 주군의 말에 맞춰 히죽거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 무능한 촌민들에 대한 경멸과 권력에서 오는 오만이 가득했다. 이들은 제국이 자랑하는 ‘정기 운용술’을 익힌 자들이었다. 비록 하급 무사들이라 해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

“촌장 나와라! 어서!”

강묵의 고함에 마을 회관이라 할 만한 허름한 초가집에서 촌장이 비척이며 나왔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등은 활처럼 휘어 있었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들이 패여 있었다. 그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강 사령관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흥, 고생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내놓아라. 황실에 진상할 정기석은 다 모았느냐?” 강묵이 손을 내밀며 턱짓했다.

정기석. 그것은 이 땅의 생명수이자, 백성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잿골 마을 사람들은 땅속 깊이 박힌 정기석 조각들을 캐내어 정화하고, 그것에서 나오는 미약한 정기를 물에 섞어 척박한 토지를 살리고 작물을 길렀다. 천룡 제국은 몇 해 전부터 정기석이 ‘황실 선인들의 수련에 필수 불가결한 재료’라며 매년 어마어마한 양의 정기석을 공물로 요구했다. 그 결과, 잿골 마을의 토지는 다시 메말랐고, 작황은 바닥을 쳤다.

촌장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깊어졌다. “사령관님, 올해는… 올해는 가뭄이 너무 심하여 정기석 수확량이 작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소인이 밤낮으로 캐내었으나… 죄송합니다. 도저히 폐하께서 정하신 양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촌장은 고개를 땅에 박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 절반? 이 늙은이가 감히 황명을 거역하겠다는 게냐?” 강묵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너희 같은 미물들이 황실에 바치는 정기석으로 폐하께서는 대륙의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정기 수련에 매진하고 계신다! 이따위 변명으로 황실을 기만할 셈이냐?”

강묵은 촌장의 멱살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촌장의 앙상한 몸이 허공에 매달려 버둥거렸다.

“흐읍, 흐읍… 사령관님, 제발…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백성들이 굶어 죽어갑니다… 정기석마저 빼앗아가시면…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촌장의 목에서 피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닥쳐라, 이 늙은이! 너희 같은 벌레들이 죽는 게 무슨 대수라고! 황실의 위엄에 도전하는 것은 곧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 강묵은 촌장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늙은 몸이 마른 흙바닥에 부딪히며 ‘퍽’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촌장은 고통에 신음하며 겨우 몸을 웅크렸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감히 누구 하나 나서서 저 오만한 무리에게 대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오랜 세월 짓눌려온 체념과 무기력이 잔뜩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유독 이글거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진우였다.

진우는 촌장의 멱살이 잡히는 순간부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팔뚝에는 힘줄이 불거졌고,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촌장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의 옆에 있던 앳된 얼굴의 어린 여동생, 예나의 손이 다급하게 그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오라버니… 안 돼…” 예나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에도 두려움이 가득했다. 진우는 동생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시선은 강묵과 그를 둘러싼 호위 무사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촌장님께 무슨 짓이냐!”

진우의 목소리는 분노에 잠겨 낮고 거칠었지만, 그 어떤 무사의 고함보다도 위압적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진우를 돌아보았다. 경악과 걱정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강묵은 재미있다는 듯 진우를 돌아보았다. “오호라, 이 미개한 촌구석에도 제법 배포 있는 놈이 있었군. 감히 네놈이 나에게 대적하겠다는 것이냐?” 그는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서늘한 쇳소리가 마을을 가득 채웠다.

진우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그는 예나의 손을 놓지 않은 채, 텅 비어버린 촌장님의 뒤편에 꽂혀 있던 낡은 쇠스랑을 단숨에 뽑아 들었다. 묵직한 쇠스랑의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은 인간도 아니야!” 진우의 목소리에 미약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아주 희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짐승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은 미약한 파동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강묵조차 순간적으로 진우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기운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제국의 무사들이 사용하는 ‘정기 운용술’과는 확연히 다른, 날것 그대로의 원시적인 기운이었다.

“건방진 놈! 감히 내 앞에서 무기를 드느냐!” 강묵은 진우의 기운을 애써 무시하며 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서 희미한 정기 기류가 흘러나와 진우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평범한 백성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진우는 본능적으로 쇠스랑을 휘둘러 그 기류를 쳐냈다. ‘챙!’ 하는 쇳소리와 함께 정기 기류가 산산조각 났다. 진우의 손이 얼얼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호오, 제법이군. 이 미천한 촌놈에게서 이런 정기가 느껴질 줄이야.” 강묵의 눈빛에 탐욕스러운 빛이 스쳤다. “잡아라! 황실에 바칠 훌륭한 재료가 되겠군! 아마 폐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강묵의 명령에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발소리가 땅을 울렸다. 진우는 쇠스랑을 꽉 쥔 채, 예나를 등 뒤로 숨기며 눈을 번뜩였다.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검을 든 무사들의 잔혹한 얼굴뿐이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잿골 마을은…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다.

진우의 뇌리에는 그 순간, 오직 그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미약한 기운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피어나는,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았다.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잿빛 숨결만을 내쉬던 마을에, 이제 막 작은 저항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