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 잿빛 궤도, 마지막 숨결

아르카디아, 한때 인류가 건설한 가장 찬란한 우주 식민지. 지금은 잿빛 먼지에 잠긴 거대한 강철 무덤일 뿐이었다. 한물간 붉은 거성 ‘세이렌’의 희미한 빛이 죽어가는 행성처럼 아르카디아의 뼈대를 간헐적으로 비췄다. 시아는 일곱 번째 구역,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이들이 간신히 숨 쉬는 눅눅한 강철 심장부에서 눈을 떴다. 산소 재활용기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케이 영칠, 오늘 동력 상태는?” 시아가 침대 아닌 강철판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잠시 후 대답할 존재를 향한 일말의 기대가 배어 있었다.

녹슨 패널들로 가득한 방 한구석, 낡고 기우뚱한 정비 로봇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빛바랜 눈 센서가 두 번 깜빡이더니,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아님, 동력 효율 12.3%. 며칠 내로 비상 전력마저 바닥납니다. 외부 구역 탐사는 필수 불가결합니다.”

케이 영칠, 오랜 친구이자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 아르카디아가 처음 건설될 때부터 이곳을 지켰던 노병 로봇이었다. 그마저도 이제는 여기저기 균열이 가고,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아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어. 매번 듣는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지옥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야.”
그녀의 눈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일곱 번째 구역은 가장 깊숙하고 안전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자원도 바닥이었다. 한때 온 우주를 풍요롭게 했던 자원 행성의 파편들이 아르카디아에 쏟아져 내린 지 수십 년. 남은 건 고작 수십 명의 생존자와, 썩어가는 강철 폐허뿐이었다.

“오늘도 방사능 수치가 가장 낮은 구역 3으로 가야 하나.” 시아가 조심스럽게 방호복을 챙겨 입었다. 두꺼운 고무와 섬유로 덧대어진 낡은 옷이었다. “혹시 다른 신호는 없어? 케이 영칠, 아주 희미한 것이라도.”

로봇의 눈 센서가 깜빡였다. “어제 자정, 정지 구역에서 미약한 에너지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불규칙적이지만, 기존 데이터와 일치하지 않는 패턴입니다.”

정지 구역. 아르카디아의 가장 안쪽, 그러나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방사능 오염이 극심하고, 구조물 붕괴가 잦아 생존자들은 접근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 한때 콜로니의 심장이자 중앙 동력 코어가 자리했던 전설의 구역이었다.

시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정지 구역에서? 어떤 종류의 에너지지?”

“분석 결과, 고대 동력 코어의 잔여 파동일 가능성 72.8%입니다. 그러나 위험합니다, 시아님. 이전 탐사대는 전멸했습니다.” 케이 영칠의 음성에 경고음이 섞였다.

“알고 있어.” 시아는 방호 헬멧을 단단히 조였다. 눈앞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깡마르고 지쳐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어. 구역 7의 생존자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면, 어쩌면 그곳에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

“동반하겠습니다.” 케이 영칠이 삐걱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안 돼.” 시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네 남은 동력으로는 견딜 수 없어. 여긴 네가 지켜야 해. 내가 돌아올 수 있도록, 그리고 혹시 내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남은 이들을 위해.” 그녀는 케이 영칠의 녹슨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시아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로봇의 음성에 희미한 슬픔이 깃들었다.

***

정지 구역으로 향하는 길은 폐허 그 자체였다. 거대한 강철 대들보들은 뒤틀린 채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고, 통로 곳곳에는 산소 농도 저하 구역이라는 경고등이 붉게 깜빡였다. 시아는 휴대용 산소마스크를 매만지며 조용히 전진했다. 그녀의 발소리만이 고요한 폐허에 울려 퍼졌다.

“케이 영칠, 신호는 아직 잡혀?” 시아는 팔목 통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미약하지만, 계속 감지됩니다. 시아님, 오른쪽 통로 진입 시 주의하십시오. 바닥의 지지대가 심하게 손상되어 있습니다.” 케이 영칠의 목소리가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들려왔다.

시아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눈앞에는 거대한 균열이 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상업 지구였을 이 통로는 이제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덫일 뿐이었다. 그녀는 균열을 넘어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방호복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잿빛과 녹슨 철의 색깔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 거대한 금속 덩어리가 나타났다. 과거 아르카디아의 핵심 보안 구역이었던 곳. 거대한 방폭문이 찌그러진 채 입구를 막고 있었다. 문틈으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저게… 저게 그 신호인가?” 시아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렇습니다. 시아님, 방사능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케이 영칠의 경고음이 다급해졌다.

시아는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내부 공기는 지독한 쇠 냄새와 오존 냄새로 가득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숨을 멎게 했다. 거대한 중앙 홀 한가운데, 찌그러지고 균열이 간 채로 거대한 동력 코어가 서 있었다. 한때 아르카디아의 생명력을 공급했던 ‘아르카디아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코어는 죽어 있었다. 아니, 죽어가고 있었다. 표면의 보호막은 부서져 있었고, 코어 내부의 에너지 흐름은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며 죽음의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완전히 망가졌잖아.” 시아의 목소리에 절망이 스몄다.

그때, 코어의 잔해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코어의 중앙 제어부였다. 먼지에 덮여 있었지만, 아직 완전히 기능이 정지된 것은 아니었다. 시아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방사능 경고음이 헬멧 안에서 미친 듯이 울려댔다.

“비상 재부팅 시스템… 수동 활성화.” 시아의 눈에 그 작은 글씨가 들어왔다. “케이 영칠, 이걸 할 수 있을까? 수동으로 코어를 재활성화할 수 있을 것 같아?”

“데이터 분석 중… 시도 가능성은 1.2%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전문 지식과 코어에 직접 접촉해야 합니다. 시아님, 방사능 피폭 위험이 치명적입니다.”

1.2%. 하지만 시아에게는 0%가 아니면 희망이 있었다. 그녀는 장갑을 벗었다. 차가운 금속이 맨손에 닿는 순간,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오래된 매뉴얼에 따라, 그녀는 조심스럽게 코어의 제어부에 손을 댔다. 복잡한 회로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아버지가 가르쳐준 기계 지식을 떠올렸다. 한때 아르카디아 최고의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망설임 없이 복잡한 선들을 연결하고, 패널들을 조작했다. 몸속으로 스며드는 방사능의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구역 7의 굶주린 얼굴들, 케이 영칠의 희망 없는 눈빛들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됐다!” 마지막 선을 연결하는 순간, 코어의 중앙부가 거대한 맥박처럼 ‘쿵!’ 하고 울렸다. 푸른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홀을 가득 채웠다. 코어의 불규칙적인 깜빡임이 점차 안정되었다. 완전히 복구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코어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아르카디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이다.

“시아님! 코어의 에너지 파동이…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케이 영칠의 목소리에 경악과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시아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정지 구역에서 돌아온 시아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케이 영칠이 그녀를 부축하여 구역 7의 비상 의료실로 옮겼다. 그녀의 몸은 방사능에 심하게 노출되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기적이었다.

“시아님, 당신은… 아르카디아를 구했습니다.” 케이 영칠의 눈 센서가 희망적으로 빛났다.

시아는 며칠 만에 깨어났다. 온몸의 세포가 저마다 비명을 지르는 듯 아팠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은 그녀의 고통을 잊게 했다. 구역 7의 희미했던 조명들이 훨씬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중앙 통신 타워에서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외부로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산소 재활용기의 효율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생존자들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시아를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응시했다. 멀리, 죽어가는 세이렌 별의 붉은 빛이 아르카디아의 잿빛 궤도를 여전히 감싸고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니야, 케이 영칠.” 시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코어를 완전히 복구하고, 아르카디아 전체를 되살리는 일… 그리고 혹시 모를 외부 세계와의 연결…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알고 있습니다, 시아님.” 케이 영칠이 그녀의 곁에 다가섰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당신의 노력 덕분에.”

시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몸속에 스며든 방사능은 어쩌면 영원히 그녀의 일부가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아르카디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처럼, 그녀의 심장도 새로운 희망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이 잿빛 궤도 위에서, 인류의 마지막 숨결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