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거친 숨결이 메마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검붉은 핏자국이 선연한 무영의 소매 끝이 야화의 이마를 가만히 짚었다. 차가운 기운이 스며든 작은 얼굴은 본래의 창백함을 넘어 투명할 지경이었다. 찢겨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야화의 어깨에는 검붉은 기운이 뱀처럼 스멀거렸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족의 기운이 역행하며 그녀의 생기를 갉아먹는 흔적이었다.

“야화… 괜찮은가? 조금만 더 버텨다오.”

무영의 목소리는 끓어오르는 불안을 감추려 애썼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길은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굴곡진 바위틈, 좁고 어두운 동굴은 잠시나마 세상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바깥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비바람 소리로 가득했다. 천지를 뒤흔들 듯 쏟아지는 빗줄기는 쫓기는 이들의 발자취를 지우고, 쫓는 이들의 시야를 가리는 유일한 방패였다.

야화는 가느다란 눈을 살며시 떴다. 핏기 없는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대의 잔영보(殘影步)가 아니었다면… 이미 나락에 떨어졌을 것을.”

그녀의 시선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무영의 얼굴에 닿았다. 무영의 왼팔에는 날카로운 검기가 스쳐 지나간 상흔이 깊게 패여 있었다. 선혈이 말라붙어 검붉게 변했지만, 통증은 여전히 끔찍한 기세로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가 무사하다면.” 무영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야화를 바라보았다. “강호의 모든 이가 우리를 적으로 돌려도, 이 마음만은 변치 않아.”

야화의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잠시 가라앉았다.
“어리석은 사람. 내가 누구인지… 잊었는가? 나는 마족(魔族)이다. 인간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불길한 존재. 그대는… 그대는 무림맹(武林盟)의 촉망받던 검선(劍仙)이었다. 이런 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말끝마다 스며드는 자책과 고통은, 그녀의 종족에게는 금기시된 ‘사랑’이라는 감정을 택한 대가였다. 무영이 그녀를 만지려던 손을 멈칫했다.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거대한 장벽에 부딪혔다. 인간과 마족. 피와 증오로 얼룩진 역사는 단 한 번도 화합을 허락한 적 없었다. 마교(魔敎)의 끔찍한 학살과 무림맹의 잔혹한 토벌전은 영원히 반복될 비극의 서막과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그 한가운데서 피어난 한 줄기 빛을 좇아버린 것이었다.

“잃지 않았다. 야화. 오히려 얻었다. 진정한 나의 세상을. 그대가 없는 세상은 내게 지옥과 다름없다. 금단이라 불려도… 이 마음은 변치 않아.”

무영은 야화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길은 거친 무인의 것이 아닌, 세심하고 애틋한 연인의 것이었다. 야화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너무 약해졌어. 내 마기(魔氣)가 흐트러져… 그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어. 어서…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해. 그들의 추격이 곧 닿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무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족의 기운은 생명을 갉아먹기도 하지만, 치유의 힘 역시 강대했다. 그러나 야화는 지금, 마족의 힘이 역류하며 스스로를 잠식하는 고통 속에 있었다. 지난 밤, 무림맹의 매복에 걸려들었을 때, 야화는 무영을 지키기 위해 금지된 마법을 사용했다. 그 대가로 그녀의 본질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동굴 바깥을 뒤흔들던 빗소리가 순간적으로 멎었다. 적막. 죽음보다 더 차갑고 깊은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무영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의 모든 감각이 경보를 울렸다.
‘왔다….’

“어찌… 비가 멎었지?” 야화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영은 팔의 고통을 잊은 채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검자루로 향했다. 명검 ‘혈혼(血魂)’은 주인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흡수하며 차갑게 빛났다.

“야화, 숨어라. 내가 막을 테니.”
“안 돼! 그대는 이미…!”
“걱정 마라. 내가 그대를 지키겠다. 끝까지.”

무영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비록 팔은 상처 입었지만, 그의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그는 동굴 입구, 빗줄기가 걷힌 틈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멀리 보이는 숲의 윤곽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그 너머에서 불어오는 냉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스윽, 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늙었지만 강철 같은 기세를 풍기는 노인. 등 뒤로는 수십 명의 무림맹 소속 고수들이 굳건한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차갑고, 검은 살의로 번뜩였다.

“흐음… 결국 여기까지 도망쳐 왔는가, 무영. 아니, 이제는 마도에 물든 배신자라 불러야겠지.”

선두에 선 노인은 다름 아닌, 무림맹의 최고 고수 중 한 명인 ‘운검자(雲劍者)’ 구 대협이었다. 그의 눈은 마치 맹금류처럼 날카로웠고, 무영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그는 무영이 존경했던 사부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구 대협….” 무영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네놈이 감히 마족의 피를 가진 요물과 손을 잡고 강호를 농락하려 들다니… 스승으로서 그를 막지 못한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구 대협의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렸다. “어리석은 놈. 지금이라도 그 요물을 베고 무림맹으로 돌아와라. 그리하면… 목숨은 살려줄 것이니.”

무영은 검자루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핏줄이 불거질 정도였다.
“요물이라니… 그녀는 야화다. 저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소중해? 마족에게 마음을 준 너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어리석은 미혹에 빠져… 무림의 수치로 전락할 셈이냐!”

구 대협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뒤따르던 무림맹 고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차가운 쇳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무영! 어서 피해!” 야화의 절규가 동굴 안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무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동굴 입구를 막아선 채,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검날 위로 번개 같은 기운이 서렸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단 한 발자국도,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 대협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허공을 가르며 무영의 심장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구 대협의 뒤를 이어 무림맹 고수들의 검기가 폭풍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동굴 안은 순식간에 살기로 가득 찼다.

무영은 몸을 날려 구 대협의 검을 막아냈다. 쨍그랑! 쇠와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한 팔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무영의 검술은 여전히 경지에 달해 있었다. 그는 ‘혈혼’을 휘둘러 좁은 동굴 입구에서 홀로 수십 명의 공격을 막아냈다. 잔영보가 허공을 수놓으며, 그의 몸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압도적인 숫자의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구 대협의 검기가 무영의 방어를 뚫고 그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핏줄기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무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크아악!”

그 순간, 동굴 안에서 거대한 마기가 폭발했다. 검붉은 기운이 용솟음치며 무림맹 고수들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들의 대열이 흔들렸다. 몇몇 고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야화였다. 그녀는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운 채, 마기를 간신히 억눌러 무영을 도왔다. 그녀의 눈은 온통 검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본질을 드러낸 마족의 모습이었다.

“야화! 안 된다! 그 힘을 쓰면…!” 무영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야화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무영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생명을 깎아내고 있었다. 마기의 폭발은 짧았지만 강력했다. 무림맹 고수들이 물러나는 틈을 타, 무영은 야화의 손을 잡고 동굴 뒤편의 비밀 통로로 몸을 날렸다.

그들은 미친 듯이 달렸다. 어둠 속, 좁고 험한 길을 숨이 턱에 차도록 내달렸다. 야화의 마기는 점점 잦아들었고, 그녀의 몸은 다시 차갑게 식어갔다. 무영의 옆구리 상처는 쉴 새 없이 피를 쏟아냈다. 그들의 발소리는 절박한 생존의 외침과 같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좁은 통로의 끝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러나 그 빛은 희망의 빛이 아니었다. 절벽 끝이었다. 낭떠러지 아래로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펼쳐져 있었다. 앞은 절벽, 뒤는 추격하는 무림맹 고수들. 사방에서 조여오는 냉혹한 포위망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알렸다.

“하아… 하아… 무영….” 야화는 무영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그녀의 몸은 차갑게 식어갔고, 의식은 점점 희미해졌다.
“아니… 야화… 안 돼… 정신 차려…!”

무영은 야화의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의 눈동자에 절망이 차올랐다. 그때, 뒤에서 무림맹 고수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구 대협의 서늘한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배신자! 이제 너희가 갈 곳은 지옥뿐이다!”

무영은 허리춤의 혈혼을 다시 움켜쥐었다. 검날에 비친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광기로 번뜩였다. 그는 품에 안긴 야화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녀의 차가운 체온은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낭떠러지 끝에 선 두 그림자. 그리고 사방에서 조여오는 냉혹한 포위망. 무영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야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핏빛 맹세가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운명은, 과연 이대로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