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내 커피잔이 춤을 춘다고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이하은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흠, 역시 금요일 밤은 이렇게 여유롭게 마무리해야지. 창밖으로는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재즈 선율이 흘러나왔다. 완벽한 마무리였다.
“후우…”
나른한 한숨과 함께 컵을 입술로 가져가려는 순간,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컵이, 아주 미세하게, 덜컹거렸다.
“…?”
이하은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아니면 손이 덜덜 떨리는 건가? 어제 마신 커피가 아직 덜 깼나? 온갖 의심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컵은 분명히 혼자 움직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쟁반 위에서 몇 밀리미터 정도 미끄러졌다.
“뭐야…?”
이하은의 미간이 좁아졌다. 기분 탓이겠지, 설마. 여기, 이 최첨단 고층 아파트에서, 그것도 내가 이사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된 이 새집에서, 그런 미신적인 일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 그녀는 컵을 다시 잡고는 무심하게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준비를 위해 화장실로 향하던 이하은은 섬뜩한 광경을 목격했다. 칫솔이 컵 안에서 거꾸로 박혀 있었다. 어젯밤 분명히 올바른 방향으로 꽂아두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갸우뚱하며 칫솔을 바로 세웠다.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그리고 오후, 점심을 먹고 잠시 자리에 앉아있을 때였다. 분명히 식탁 위에 두었던 리모컨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소파 밑, 책장 뒤, 심지어 냉장고 안까지 뒤졌지만 감쪽같이 사라진 리모컨은 찾을 수 없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던 그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위, 베개 옆에 얌전히 놓여 있는 리모컨이었다.
“내가… 침대에 리모컨을 두는 취미가 있었나…?”
이하은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건 단순히 ‘깜빡’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군가 몰래 들어와서 장난을 치는 건가? 하지만 문은 항상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의 흔적도 전혀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이상한 현상은 더욱 빈번해졌다. 책장 위에서 책이 한 권씩 툭, 하고 떨어지거나, 거실 등이 혼자 깜빡거리기도 했다. 심지어 잠을 자려는데 침대 시트가 발끝으로 조금씩 끌려 내려가는 기분까지 들었다.
“흐읍… 으읍…”
이하은은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린 채 몸을 웅크렸다. 이건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대체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이사 온 첫날부터 밤마다 들리던 희미한 긁는 소리, 혼자 열리는 옷장 문…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다 내 착각일 거야. 이성은 그렇게 외쳤지만, 몸은 이미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순간, 거실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하은의 심장이 발끝으로 곤두박질쳤다.
“흐아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은 안 돼! 이건 꿈이 아니야! 손에 잡히는 가장 가까운 물건, 낡은 테니스 라켓을 움켜쥐고 방문을 확 열었다. 거실 한가운데, 어제 아끼는 와인잔이 깨져 있었다.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이… 이… 이 변태 귀신아! 당장 안 튀어나와?!”
이하은은 눈을 질끈 감고 라켓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는 쉭쉭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미쳤어, 내가 정말 미쳤나 봐. 귀신한테 소리 지르고 라켓을 휘두르다니!
그때였다.
“저기요.”
나직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하은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맙소사,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귀신이 말을 해! 게다가 목소리가… 너무 좋잖아? 나름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이 와중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누,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옆집 김민준입니다만.”
옆집? 옆집이라고? 이하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파자마 바지에 티셔츠 차림의 남자가 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조금 풀린듯한 눈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조각 같은 외모가 빛을 발했다. 방금 잠에서 깬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 새벽 2시 17분이거든요.”
김민준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의 눈은 와인잔 파편과, 그 파편을 등지고 테니스 라켓을 든 채 사시나무 떨듯 서 있는 이하은을 번갈아 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이하은은 라켓을 땅에 떨궜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집에 귀신이 나타나서 와인잔을 깼어요! 라고 말하면 바로 정신병원 예약이 잡힐 것이 분명했다.
“혹시… 괜찮으세요?”
김민준은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걱정보다는 약간의 호기심과 피곤함이 섞여 있는 듯했다.
“네, 네? 아, 네! 그럼요! 아주 괜찮습니다! 그냥 제가 좀, 그… 운동을 하다가…”
이하은은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새벽 2시에 테니스 라켓을 들고 거실에서 무슨 운동을 한단 말인가. 누가 봐도 수상한 상황이었다.
김민준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픽, 하고 짧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이하은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운동요. 새벽 두 시에요?”
“아, 그, 그게… 제가 불면증이 좀 있어서요. 갑자기 운동이 하고 싶어지는… 그런 이상한 병이…”
어버버 거리는 이하은을 보며 김민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깨진 와인잔을 한 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치워드릴까요?”
“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치울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유리 파편은 위험하니까.”
그는 싱크대 밑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더니 능숙하게 파편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이하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기… 정말 죄송한데, 층간 소음 때문에 깨신 건가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쿵쾅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는 파편을 다 쓸어 담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는 똑바로 서서 이하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짙은 밤색이었고,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깊이가 담겨 있었다.
“꽤 시끄럽던데요. 뭔가 던지기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새벽에 테니스 치는 소리도 그렇고.”
이하은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웃에게 첫인상이 완전 최악으로 박혀버렸다. “이상한 병”을 가진 “새벽 테니스 괴물”이라니.
“정말 죄송해요.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요?”
김민준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왠지 모르게 비웃음처럼 들렸다.
“음, 저는 개인적으로 좀 더 흥미로운 걸 기대하고 있는데.”
“네?”
이하은이 고개를 들자, 김민준의 시선이 그녀의 뒤편, 희미하게 빛나는 복도 끝을 향해 있었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쨌든, 층간 소음은 죄송합니다. 다음에 커피라도 한 잔 사드릴게요.”
김민준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하은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가 돌아간 후에도, 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마지막 시선이 향했던 복도 끝… 그곳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날 밤, 이하은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노려보던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김민준, 그 남자의 눈빛은 단순히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혹시… 그 남자도?
그때였다. 거실에서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꺼두었던 스탠드 조명이, 혼자서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소리였다.
“으아아악!!!”
이하은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더 이상 못 참아! 이건 진짜 선을 넘은 거야!
그녀는 핸드폰을 움켜쥐고 다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수신자는 단 한 명. 옆집 남자, 김민준.
[새벽에 죄송한데요. 잠시… 저희 집에 와주실 수 있나요? (제발요 ㅠㅠ)]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답장이 왔다.
[또 와인잔이 깨졌나요? 아니면 이번엔 접시인가요?]
이하은은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일들을.
아니, 어쩌면…
그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아닐까?
등골이 오싹해지는 생각에 이하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
[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요…]
5분 후, 김민준은 다시 그녀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잠옷 차림 그대로, 한 손에는 핫팩을 들고.
“혹시… 추우신가 해서요.”
그의 말에 이하은은 순간 빵 터져 버렸다. 공포와 황당함, 그리고 이 상황의 코미디가 뒤섞여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하하하… 추위는 안 타요, 제가.”
“그래요? 그럼 됐고.” 그는 피곤한 듯 눈을 비볐다. “그래서, 이번엔 뭐가 ‘춤’을 추나요?”
이하은은 그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거실로 들어선 김민준은 스탠드 조명이 여전히 미친 듯이 깜빡이는 것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오, 이번엔 조명 쇼인가 보네요.”
그의 담담한 태도에 이하은은 기가 막혔다.
“이게 웃겨요?! 지금 저희 집에 귀신이 살고 있다고요!”
“귀신이요?” 김민준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좀 더… 활동적인 존재 같은데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이하은의 아끼는 핑크색 토끼 인형이 스르륵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이하은은 비명을 지를 준비를 했지만, 김민준의 다음 행동 때문에 비명은 목구멍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떨어진 토끼 인형을 주워 들더니, 무심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쭈, 이젠 인형까지 넘보는군. 너 정말 혼나야겠네.”
마치 반려동물을 다루는 듯한 김민준의 말과 행동에 이하은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저 남자는, 우리 집 폴터가이스트한테 말을 걸고 있는 건가?
이하은의 머릿속은 ‘?’로 가득 찼다. 이 미스터리한 옆집 남자, 김민준은 대체 누구이며, 그는 이 모든 기괴한 현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핑크색 토끼 인형은 또 왜 하필 지금 떨어졌을까?
밤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