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파편: 잠들지 않는 도시의 비명
서울은 잠들지 않는 도시다. 빌딩 숲은 밤에도 제 심장을 태워 빛을 토해냈고, 그 불빛 아래에서 수많은 삶과 죽음이 엇갈렸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그 불빛마저 집어삼키는 듯한 기이한 침묵을 동반했다. 오늘 밤, 나의 침묵을 깬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다.
“하진 씨. 제발, 제발 좀 받아줘요!”
낡은 자개장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구형 스마트폰이 맹렬하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김민준 경위’라는 이름이 깜빡였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밤중에 김 경위의 전화는 언제나 재앙의 서곡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항상 혼돈과 좌절이 뒤섞여 있었으니까.
“김 경위님. 이 시간에 굳이 안부 전화를 거신 건 아닐 텐데요.”
나는 전화 수화부를 귀에 댄 채, 손에 들고 있던 고서의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라틴어로 쓰인 텍스트는 불분명한 고대 문자의 잔재와 뒤섞여 있었다. 책은 굳이 설명하자면, 오래된 건축물의 ‘에너지 흐름’에 대한 사변적 탐구에 가까웠다.
“안부? 지금 안부 물을 때입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졌어요! 또… 또 밀실입니다, 하진 씨!”
김 경위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또’라는 단어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소리 끝에 묻어나는 절망감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밀실 살인. 그것도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사건. 경찰 조직이 가장 혐오하고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종류의 사건. 그리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사건.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때로는… 불쾌한 잔류 기운을 남기는.
“이번엔 어디죠?”
나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방은 굳이 정리하자면 ‘혼돈’ 그 자체였다. 고서적, 낡은 오르골, 알 수 없는 금속 조각들, 형이상학적 도형이 그려진 캔버스, 그리고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온갖 사건 파일들. 나는 그 복잡한 틈을 요리조리 피해 침대 옆에 걸려있던 낡은 트렌치코트를 집어 들었다.
“강태성! 태성테크 강태성 대표입니다! 어제 밤 10시쯤 퇴근해서 펜트하우스로 올라갔는데, 오늘 아침에 비서가 연락이 안 돼서 찾아갔더니… 젠장, 살해당해 있었어요!”
“태성테크라… 한때 인공지능 분야의 선구자라고 불리던 인물이었죠. 최근에는 대외 활동이 뜸했고요.”
“맞아요. 그래서 더 수상합니다. 은둔형 생활을 하던 사람이 왜 이런 식으로… 아, 일단 와서 직접 보셔야 합니다! 현장은 삼성동 ‘아르테스 레지던스’ 펜트하우스입니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전화를 끊었다. 스마트폰을 다시 자개장 위에 던져두자, 그 위에서 방금 펼쳐둔 고서가 기이하게 빛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기분 탓이겠지.
***
새벽 3시. 서울 삼성동 ‘아르테스 레지던스’는 밤의 장막 아래에서도 위용을 뽐냈다. 70층 높이의 펜트하우스는 도시의 밤을 발아래에 두는 듯했다. 건물 입구부터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수수사팀과 과학수사팀, 그리고 관할 경찰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진 씨! 이쪽입니다!”
김 경위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절망과 안도가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피해자는 강태성 대표. 서재에서 발견됐습니다. 사인은 칼에 의한 단일 자상. 흉기는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밀실이라는 겁니다.”
김 경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짓을 따라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되어 있던 노란색 폴리스 라인 안으로 들어섰다.
강태성의 펜트하우스는 현대 미술관을 연상케 했다. 간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가구, 벽면에 걸린 추상화들, 그리고 큼직한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현란한 서울의 야경. 피해자가 발견된 서재는 거실 안쪽에 위치한, 비교적 아늑한 공간이었다.
“서재 문은 안에서 걸쇠까지 걸려 있었습니다. 창문은 특수 방탄유리로 외부와 완전히 밀폐된 구조고요. 환기구도 성인이 드나들기엔 불가능한 크기입니다.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CCTV에도 어제 밤 10시 이후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강 대표가 들어간 후로 말이죠.”
김 경위의 설명은 완벽하게 ‘불가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굳이 그의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서재 입구에 서는 순간, 나는 이 방이 풍기는 기묘한 잔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마치, 이 공간의 시간과 밀도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는 듯한, 그런 불쾌하고 모호한 감각. 일반인들은 눈치채지 못할, 아주 작은 균열 같은 것.
나는 서재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그 옆에 강태성 대표의 시신이 덮개에 덮여 있었다. 감식반 요원들이 조용히 움직이며 증거를 채취하고 있었다.
나는 시신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방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내 시선은 벽에 걸린 추상화, 책상 위의 태블릿 PC, 심지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한 점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뭐라도 보이는 게 있습니까, 하진 씨?” 김 경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마치 무언가를 더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내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주 희미하고, 거의 없는 것에 가까운.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이 방의 공기 흐름에 미세한 왜곡이 느껴진다. 빛의 파장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듯한. 마치 투명한 막이 씌워진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밀폐된 공간에서 이렇게 신선한 공기가 느껴지는 건 의아하군요.” 내가 중얼거렸다.
김 경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어컨은 켜져 있었습니다만… 그게 뭐 문제라도?”
“아뇨.”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에어컨 바람과는 다릅니다.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외부’의 기운이 섞여 들어오고 있어요. 마치, 보이지 않는 틈새를 통해 스며든 것처럼.”
나는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태블릿 PC 화면은 꺼져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수정 오브제가 놓여 있었다. 평범한 기념품처럼 보였지만, 내 눈에는 그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도로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에너지가 감지됐다. 차갑고, 날카로운, 마치 얼음 칼날 같은 기운.
나는 수정 오브제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온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김 경위님. 이 방은 밀실이 아닙니다.”
내 말에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김 경위는 물론, 감식반 요원들까지 나를 돌아봤다.
“하진 씨, 무슨… 그런 황당한 소리를! 모든 증거가 밀실을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까?”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겠죠.” 나는 수정 오브제를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오브제 표면에 미세한 빛의 굴절이 느껴졌다. “하지만, 살인자는 이 방에 ‘물리적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물리적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서재의 한쪽 벽을 손으로 짚었다. 매끈하게 마감된 벽지 너머로, 차가운 돌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기운 사이에서,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흔적’이 감지됐다. 마치 벽이 한순간 액체가 되어 무언가를 통과시키고 다시 굳은 듯한, 그런 기괴한 흔적.
“이 방은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여러분의 인식이 그렇게 믿도록 강요당했을 뿐이죠.”
나는 김 경위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내가 던진 수수께끼를 해독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읽혔다.
“살인자는… 벽을 통과한 겁니다.”
내 말은 서재에 모인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불가능의 장막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도시의 그림자 속에 숨겨진 또 다른 세계의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살인이 아니었다.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된, 기괴하고 위험한 게임의 서막이었다.
강태성은 대체 무엇을 건드렸기에, 이런 방식으로 죽어야 했던 걸까. 이 수정 오브제는 또 무엇이며, 이 방에 남은 비정상적인 잔류 기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밀실의 비밀은 이제 겨우 첫 번째 실마리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