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어둠의 장막이 천검대륙을 드리운 지 어언 오백 년. 잠시 스러졌던 마의 기운은 더욱 깊고 끈적하게 대지를 옥죄어 오고 있었다. 고요했던 산맥은 굉음을 토하고, 맑았던 강물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떨며 오래된 예언을 되뇌었다. 마황(魔皇)의 부활. 그리고 그를 막아설 유일한 존재, ‘구원자’의 등장을.

하여, 천하의 모든 무림 세력은 뜻을 모았다. 천룡산(天龍山) 신룡봉(神龍峰)에 세워진 거대한 용봉대(龍鳳臺)에서 ‘천하제일무예대회’를 열어, 마황에 대항할 단 한 명의 구원자를 가리기로 한 것이다.

용봉대의 중앙, 팔각으로 이루어진 비무대 위에 홀로 선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청명(淸明). 빛깔 바랜 도포를 걸쳤지만, 그 단단한 어깨와 깊은 눈빛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그는 명망 높은 문파 출신도 아니었고, 화려한 무공을 자랑하는 강자도 아니었다. 그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홀로 무예를 수련하며 세상의 부름에 응답한, 이름 없는 고수일 뿐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검은 심장문’의 후계자, 흑영(黑影)이 서 있었다. 온몸을 휘감은 검은 장포와 허리춤에 찬 쌍검은 그의 음산한 위용을 더했다. 흑영은 이미 수많은 강자들을 그림자처럼 베어 넘기며 결승에 올라선 자였다. 그의 눈빛에는 오만함과 더불어, 청명을 깔보는 듯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허. 듣보잡 자가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천하제일대회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군.” 흑영이 비웃음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처럼 비무대에 울려 퍼졌다. “네놈의 이름조차 아는 이가 없으니, 이 흑영이 친히 기억해 주마. 너는 여기서 한 줌의 먼지가 될 운명이다.”

청명은 묵묵히 흑영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렁이는 감정 대신, 고요한 호수 같은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름은 중요치 않소. 중요한 것은 이 자리의 의미.” 청명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 없는 단단함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곳에 섰는지 아오?”

“흥, 가소롭군. 구원자? 그딴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있겠지.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자는 오직 절대적인 힘을 가진 자. 바로 나다!” 흑영은 말을 마치는 순간,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 들었다. 챙그랑! 날카로운 금속음이 대기를 갈랐다. 그의 쌍검은 마치 어둠을 머금은 듯 시퍼런 빛을 뿜어냈다. “받아라! 잔영검법 제1식, 흑월섬(黑月閃)!”

흑영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공간을 일그러뜨린 듯, 섬광과 함께 비무대 위에는 수십 개의 잔영이 펼쳐졌다. 어디가 진짜이고 어디가 허상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였다. 그 잔영들 사이에서 쌍검이 번뜩이며, 수십 갈래의 검기가 청명을 향해 쇄도했다.

청명은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오직 ‘기(氣)’의 흐름에 집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일 뿐, 진정한 공격은 기의 흐름을 따라야만 파악할 수 있었다. 수많은 검기 속에서, 청명의 발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혹은 바람이 스치듯 가볍게. 그는 흑영의 검기가 닿기 직전, 종이 한 장 차이로 모든 공격을 피했다.

“젠장! 잔재주를 부리는군!” 흑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잔영검법 제2식, 흑풍만월(黑風滿月)! 회오리치는 검기가 더욱 맹렬해졌다. 비무대 위에는 검은 폭풍이 몰아치는 듯했고, 청명은 그 폭풍의 한가운데서 홀로 고요한 섬처럼 서 있었다.

청명은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움직임을 통해 흑영의 검기를 읽고, 그 검기의 힘을 역이용하려 했다. 그의 손끝에서 ‘유수권(流水拳)’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났다. 강한 것을 강하게 받아치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감싸 안아 방향을 바꾸는 무공.

“네놈,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셈이냐!” 흑영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는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로 결심했다. “잔영검법 최종식, 멸겁흑영참(滅劫黑影斬)!”

흑영의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나더니, 두 자루의 쌍검에 흡수되었다. 쌍검은 거대한 어둠의 칼날로 변했고, 비무대 위 모든 잔영이 하나로 모여 흑영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거대한 그림자 칼날이 된 듯했다. 이윽고, 흑영은 전방을 향해 몸을 던졌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검은 칼날이 청명을 향해 날아들었다. 공간마저 찢어버릴 듯한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 순간, 청명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는 비무대 중앙에 굳건히 발을 디뎠다. 그의 온몸에서 푸른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맑은 샘물 같았고, 동시에 거대한 파도와도 같았다. 양손을 앞으로 내민 청명의 손바닥에는 작지만 강렬한 기운의 응집체가 형성되었다.

“유수권 최종 오의, 회귀천강(回歸天罡)!”

청명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기운은 마치 거대한 파도가 흑영의 검은 칼날을 감싸 안듯이 퍼져 나갔다. 검은 칼날은 푸른 파도에 갇혔고, 그 엄청난 파괴력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신, 고스란히 푸른 기운 속에 갇혔다. 청명은 그 힘을 흡수하고, 다시 흑영에게로 되돌려 보냈다.

“무… 말도 안 돼! 내 공격이…!”

흑영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자신의 모든 힘이 담긴 검은 칼날이, 역으로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으나, 자신이 뿜어낸 힘을 어찌 당해낼 수 있을까.

콰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비무대가 뒤흔들렸다. 비무대 중앙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고, 흑영은 엄청난 충격에 휩쓸려 비무대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몸에서는 검은 기운이 흩어지며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쌍검은 부러져 멀리 날아갔다.

연기가 걷히자, 비무대 위에는 청명만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다. 승패는 결정되었다. 장내는 한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수많은 무림인들은 방금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름 없는 청년이 천하의 흑영을 쓰러뜨린 것이다.

이윽고, 천룡산의 최고 원로, 도관(道觀)의 현룡 진인이 비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감동과 함께 엄숙함이 서려 있었다.

“승자, 청명!” 현룡 진인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그대의 무공은 단순한 힘을 넘어, 천지의 이치를 담고 있구나. 그대가 바로 마황의 부활에 맞설, 예언 속의 구원자다!”

청명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구원자. 그 무거운 칭호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의 승리는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어둠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고, 마황의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질 터였다. 청명의 눈은 멀리, 어둠이 짙게 깔린 대륙의 끝자락을 응시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것을. 그의 손끝에서 푸른 기운이 다시 한번 작게 일렁였다. 그것은 희망의 불씨였고, 동시에 거대한 폭풍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천하의 운명은 이제 그의 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