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빌딩 숲은 밤이 깊어질수록 차가운 강철의 뼈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강민호는 짙은 어둠이 깔린 고층 빌딩의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아래로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졌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 가장 높이 솟아오른 유리궁전의 꼭대기. 이선우, 그 개자식이 모든 것을 걸고 구축한 제국.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릿한 핏물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도시의 공기. 민호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한기는 고통스러우리만치 선명한 과거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함께 밤새워 웃고 떠들던 시절, 등을 맞대고 거친 이능의 세계를 헤쳐나가던 시간들. ‘우리는 형제보다 더한 사이다.’ 선우는 늘 그렇게 말했다. 그 달콤한 거짓말에, 민호는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 대가는 처절한 배신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민호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칼날과 같았다. 한순간의 방심. 잔혹한 웃음. 그리고 등 뒤로 날아든 이능력자의 공격. 그 모든 것이 이선우,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꾸며낸 각본이었다. 민호의 이능을 탐하고, 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 버려졌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때, 민호의 세상은 이미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유령처럼 세상에 홀로 남았다.
살아남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복수. 이선우, 그 자의 모든 것을 짓밟아버릴 때까지, 그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선우야…”
나직이 읊조린 이름은 더 이상 그리움이 아닌, 지옥의 불길이 타오르는 맹세였다. 그의 눈빛이 일순 섬뜩하게 번뜩였다.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증오가 뒤섞여, 그의 전신에서 검은 그림자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오른손에 쥐어진 오래된 은제 회중시계가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선우가 선물했던 물건이었다. 그날의 배신 이후, 민호는 이 시계에 역겨운 저주를 걸었다. 선우가 파멸하는 순간, 이 시계 또한 깨져버릴 것이다. 그 깨지는 소리가 민호의 복수가 완성되는 신호탄이 될 터였다.
민호는 난간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중력은 그의 의지 앞에서 무의미했다. 발밑으로 허공이 아찔하게 펼쳐졌지만, 그는 단단한 땅을 걷는 것처럼 침착했다. 그의 몸은 어둠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고층 빌딩의 외벽을 따라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내려가던 그는, 정확히 37층의 한 사무실 창문 앞에서 멈췄다.
이곳은 이선우가 세운 ‘아크 프로젝트’의 핵심 연구실 중 하나. 겉으로는 최첨단 생명공학 기업을 표방하지만, 그 속내는 썩어문드러진 이능력자들의 암거래와 금단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이선우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가장 위험한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포식자였다.
유리창에 손을 대자, 희미한 푸른빛과 함께 정교한 보안 장치들이 그의 눈에 보였다. 레이저 그리드, 움직임 감지 센서, 에너지 파장 분석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방어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민호는 이미 수도 없이 이곳의 보안 시스템을 분석해왔다. 그의 이능은 그 어떤 시스템도 우회할 수 있는 ‘침식’의 힘이었다.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유리창을 서서히 물들였다. 마치 잉크 방울이 맑은 물에 퍼지듯이, 검은 그림자가 유리창의 모든 보안 회로를 잠식해 들어갔다. ‘쉬이이익-‘ 아주 미세한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안쪽으로 스르르 열렸다. 마치 존재하지 않던 문이 열린 듯했다.
민호는 그림자처럼 실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연구실 내부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푸른색 조명 아래 몇몇 모니터가 빛나고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기이한 형태의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섬세한 인체 해부도 같기도 하고, 어떤 에너지 흐름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주위로 온갖 복잡한 장비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민호의 시선은 곧장 테이블 위로 향했다. 홀로그램 아래, 고대 문자로 빼곡하게 채워진 두툼한 양피지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아니, 이선우에게 강탈당한 ‘그것’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했다. 민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선우… 네가 감히 그걸 손에 넣으려 하는구나.”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는 최대한 움직임을 억제하며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인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민호의 감각은 어떤 미세한 이질감을 포착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가장 구석진 모니터 앞으로 다가섰다.
모니터는 꺼져 있었지만, 민호의 손이 닿자마자 푸른빛과 함께 화면이 살아났다. 그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스크린을 스쳤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모니터 속 데이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민호의 눈동자가 빠르게 수많은 정보를 훑었다. ‘검은 심장 프로젝트’, ‘코드명: 하르마’, ‘생체 에너지 동조율 98%…’
‘하르마…’ 그가 잃어버린 능력이었다. 단순히 이능을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이선우는 그 이능을 이용해서, 어떤 거대한 존재와 동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민호의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그림자가 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그때였다. 연구실 한쪽 구석에 놓인 작은 액자 프레임에서 미세한 에너지가 감지되었다. 민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벽과 하나가 된 것처럼 그의 존재감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쳇, 늦었잖아.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짜증 섞인 목소리와 함께, 벽 뒤편에 숨겨진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문을 통해 나타난 것은 이선우의 오른팔 격인, ‘그림자 사냥꾼’으로 알려진 한시우였다. 시우는 늘 칼날 같은 눈빛을 지닌 남자였다. 민호는 그를 기억했다. 선우와 함께 다니던 어중이떠중이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제법 이능의 고수가 되어 있었다.
시우는 이리저리 연구실을 훑어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양피지 두루마리를 확인했다.
“젠장, 아직도 오지 않았단 말이야? 대표님께서 직접 오실 줄 알았더니.”
그의 말에 민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표님’? 선우가 직접 온다고? 지금 이곳으로?
시우는 짧은 한숨을 쉬더니, 품속에서 작은 단말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무전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 순간, 민호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그 이름을 부르지 마.”
섬뜩한 목소리가 시우의 등 뒤에서 울렸다. 시우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민호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쇠사슬처럼 단단한 악력이 시우의 숨통을 조여왔다.
“크헉… 너, 너는… 강민호?!”
시우의 눈이 공포로 크게 뜨였다. 죽은 줄 알았던 민호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예전과 다르게 창백했지만, 그 눈빛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귀처럼 섬뜩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는구나. 다행이네. 네놈에게 내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줄 필요가 없어졌으니.”
민호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가운 얼음처럼 시렸다. 시우는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이능을 사용하려 했지만, 민호의 손아귀는 너무나 강했다. 그의 이능이 시우의 몸을 잠식하는 순간, 시우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선우… 그 개자식이 지금 어디 있지?”
민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시우는 숨을 헐떡이며 눈알을 굴렸다. 입을 열면 죽을 것이고, 열지 않아도 죽을 것이다. 하지만 민호의 눈빛은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흐읍… 대… 대표님은… 지금… 지하… 지하 5층에…”
시우의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온 말은 민호의 심장을 꿰뚫었다. 지하 5층. ‘검은 심장 프로젝트’의 심장이 있는 곳. 이선우가 그곳에서 어떤 끔찍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 민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민호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시우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지하 5층에… 무엇이 있지?”
“괴… 괴물… 괴물을 깨우려… 헉!”
시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호는 그의 목을 부러뜨렸다. ‘뚝’ 하는 섬뜩한 소리가 정적에 휩싸인 연구실에 울려 퍼졌다. 시우의 몸은 맥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민호는 죽은 시우를 한 번 훑어보더니, 그의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단말기에는 ‘대표님’이라고 저장된 연락처가 있었다. 민호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당장 이선우에게 연락할 것인가, 아니면…
그때, 단말기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대표님’. 이선우였다.
민호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했다. 이선우가 직접 시우에게 연락을 해왔다는 것은, 그가 지하 5층에서 진행하는 일에 뭔가 중대한 전환점이 다가왔다는 증거일 터.
손안의 단말기를 내려다보던 민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좋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직접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시우야. 진행 상황은?” 이선우의 목소리가 단말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목소리. 마치 이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 있다는 듯한 오만함이 뚝뚝 묻어났다. 그 목소리가 민호의 귓가에 닿는 순간, 민호의 분노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솟구쳤다.
민호는 애써 감정을 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순조롭습니다, 대표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선우는 민호의 목소리가 평소 시우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을까? 아니면,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길까? 민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잘됐군. 내가 곧 올라가지. 그 전에, ‘그것’의 마지막 동기화 작업을 시작해놔.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이선우의 목소리에서 기쁨과 흥분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그것’의 마지막 동기화라니.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민호는 손에 땀이 흥건해지는 것을 느꼈다. 곧 이선우가 이곳으로 올라올 것이고, 그들의 파멸적인 재회가 이루어질 것이다.
민호는 단말기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아귀 안에서 플라스틱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모든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당신이 이 도시에 가져올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꺼이.”
민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보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선우의 모든 것을 파괴하겠다는, 피에 물든 맹세였다. 그는 이선우가 깨우려는 ‘괴물’을, 그의 손으로 다시 봉인할 것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그 자신마저도 괴물이 되어야 한다 할지라도.
통화가 끊겼다. 민호는 허탈하게 웃으며 단말기를 부쉈다. 그의 눈은 지옥의 핏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이 지옥 같은 밤의 끝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민호는 시우의 시체를 무심히 밟고 지나쳐, 홀로그램이 떠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의 손이 홀로그램 위를 스치자,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이능의 기운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이제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선우가 도착하기 전, 그의 심장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겨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은 서리꽃이 피는 밤이었다. 그리고 그 꽃은, 가장 아름답고도 잔혹한 복수를 알리는 전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