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세상은 죽었다. 더 정확히는, 반쯤 죽은 채로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한때는 찬란한 문명이 꽃피웠을 대륙은 이제 잿빛 먼지와 부서진 잔해들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은 항상 탁한 회색빛이었고, 태양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겨우 제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공기 중에는 쇠비린내와 눅눅한 흙먼지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까끌거리는 입자들이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에이든은 낡은 방독면을 고쳐 쓰며 부서진 건물 더미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발밑에서는 깨진 유리 조각과 금속 파편들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곳은 한때 ‘빛의 도시’라 불렸던 에이레네의 폐허였다. 이제는 그저 ‘잿빛 도시’라 불릴 뿐, 빛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죽은 공간이었다. 그는 지난 며칠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갈증과 허기가 뼈를 갉아먹는 듯했다. 손에 쥔 닳아빠진 철제 봉은 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지팡이였다.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군.”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방독면 안에서 먹먹하게 울렸다. 이 도시에 남은 것이라곤 부패하지 않는 쓰레기더미뿐이었다. 며칠 전 운 좋게 발견한 통조림 한 조각이 마지막 식량이었다. 이제는 썩은 음식조차 귀했다.

에이든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붕괴 직전의 건물,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로운 잔해들, 그리고 그 잔해 속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위험. 이곳은 온갖 종류의 변이된 생명체들로 가득했다. 독성을 뿜는 덩굴 식물부터,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으로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는 짐승들까지.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는 순간, 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때 백화점이었을 거대한 건물의 입구로 향했다. 무너진 간판에는 ‘럭스 백화점’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뻥 뚫린 입구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랜턴을 꺼내 들었다. 건전지는 거의 바닥이었지만, 희미하게 빛을 비출 수는 있었다.

내부는 지독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은 대부분 붕괴하여 하늘이 보였고, 바닥은 쓰레기와 먼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로 뒤덮여 끈적거렸다. 에이든은 랜턴을 천천히 휘두르며 주위를 살폈다. 1층의 명품 매장들은 이미 약탈당하고 부서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지하 창고 같은 곳은…”

에이든의 시선이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난간은 녹슬어 부식되었고, 계단은 일부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희망은 오직 이런 위험한 곳에만 존재했다. 그는 무너진 계단 벽을 조심스럽게 짚고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지고 습해졌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은 한정적이었지만, 에이든은 바닥에 뒹구는 뼈 조각들을 보았다.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지하 창고는 생각보다 넓었다. 텅 빈 선반들과 부서진 상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곳 역시 이미 여러 번 털린 듯했다. 에이든은 벽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다 그의 발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낡은 나무 상자였다. 다른 상자들과는 달리 뚜껑이 단단히 닫혀 있었고, 겉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에이든은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히고 상자를 확인했다. 틈새로 미세한 흙먼지가 새어 나와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상자들보다는 온전해 보였다.

“이건… 뭐야?”

그는 철제 봉을 상자의 틈새에 끼워 넣고 힘을 주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조금씩 들렸다. 안에서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 대신, 희미하게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어떤 약초 같은 향이 풍겨 나왔다. 기대감에 에이든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뚜껑이 완전히 열리자, 랜턴 불빛 아래에서 상자 속 내용물이 드러났다. 낡고 바싹 마른 가죽 두루마리 몇 개와, 깨지지 않은 작은 유리병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에이든은 떨리는 손으로 가죽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펼쳐보니, 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도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떤 마법 의식의 설명서 같기도 했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리고 유리병. 그중 하나를 들어 올리자, 안에 든 투명한 액체가 희미한 불빛을 반사했다. 아무 색도, 향도 없었지만, 에이든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귀한 물건임을 느꼈다. 어쩌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일지도, 아니면 지친 몸에 활력을 줄 약물일지도 몰랐다.

“이런 곳에 이런 게…”

그 순간이었다.

정적을 깨고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텅 빈 창고를 가로지르는 불쾌한 마찰음. 에이든의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상자를 재빨리 닫고 랜턴을 껐다. 칠흑 같은 어둠이 다시 그를 집어삼켰다. 방독면 너머로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

철제 봉을 고쳐 쥐었다. 그 소리는 가까웠다. 창고 안, 어딘가에서.
그리고 곧,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점이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피에 굶주린 짐승의 눈동자처럼.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에이든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낡은 선반 뒤편으로 몸을 웅크린 채, 그는 철제 봉을 꽉 쥐었다. 상대는 최소한 둘 이상이었다. 붉은 눈이 천천히 그의 위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앙상한 사지, 뒤틀린 척추가 그대로 드러난 검은 가죽의 몸통, 그리고 머리에는 마치 오래된 갑옷 조각을 뒤집어쓴 듯한 기괴한 형상의 뿔이 솟아 있었다. 입에서는 노란색의 점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부식자’라고 불리는 변이체였다.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독성 침을 뱉어내는 놈들. 한때는 작은 설치류였던 것들이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변이된 것이었다.

놈들은 에이든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랜턴 불빛이 없으니 시각은 희미했지만, 에이든은 놈들의 썩은 살 냄새와 끈적한 침 떨어지는 소리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숨죽이며 기다렸다. 놈들이 가장 가까이 왔을 때, 기습적으로 공격하거나 도망칠 기회를 노려야 했다.

부식자 한 마리가 선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놈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에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쓰으읍…

부식자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압력이 새는 소리 같기도 했고, 빠르게 불을 끄는 소리 같기도 했다. 놈들의 붉은 눈이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이 느껴졌다.

크아아악!

비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한 마리의 부식자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비명 소리. 혼란에 빠진 부식자들이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든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재빨리 랜턴을 켜고 어둠을 가로질렀다. 빛이 비추는 곳에는 두 마리의 부식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놈들의 몸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검은 가죽은 심하게 녹아내려 있었다. 마치 강한 산성액이라도 뿌린 것처럼.

그리고 그 너머,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는 에이든과 마주쳤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실루엣은 에이든보다 키가 작았지만, 이상하리만치 단단하고 굳건해 보였다. 손에는 무언가 반짝이는 물건을 쥐고 있었다.

“누구냐?”

에이든이 경계하며 철제 봉을 겨누었다. 그의 목소리는 방독면 안에서 거칠게 울렸다.
그림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천천히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랜턴 불빛이 닿는 곳, 그림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검고 긴 머리카락은 낡은 두건 아래로 흘러내렸고, 얼굴은 먼지와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맑고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에이든이 본 것 중 가장 생기 있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푸른 눈동자가 에이든을 응시하는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림자의 한쪽 어깨에는 낡고 찢어진 천으로 둘러싸인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든 반짝이는 물건은… 긴 금속제 활이었다. 활시위는 이미 당겨져 있었고, 화살촉은 에이든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활이 아니었다. 활대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활시위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장전된 화살촉은 마치 얼음 조각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그림자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위압감은 주변의 냉기를 더하는 듯했다.
에이든은 숨을 멈췄다. 그의 목덜미에 차가운 땀방울이 맺혔다.
위험했다. 이 소녀는 자신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선택해야 했다.

“난 아무것도 해치지 않았다.” 에이든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소녀의 푸른 눈이 에이든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은 에이든의 철제 봉에서 허리춤의 작은 가죽 주머니, 그리고 손에 쥔 유물 상자까지 훑어 내려갔다.

“네 손에 든 것, 내놔.”

그녀의 목소리는 명령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에이든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황폐한 세상에서 겨우 찾은 작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목에 겨눠진 얼음 화살촉은 그 희망을 한순간에 산산조각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날 죽일 셈이냐?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소녀의 푸른 눈동자에 일렁이던 미세한 감정이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해졌다.
“넌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할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활시위가 더욱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음 화살촉이 더 강렬하게 빛났다.
에이든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자세였다.
“좋아. 가져가라.”

그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녀는 여전히 활을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에이든을 잠시 더 지켜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상자 쪽으로 걸어왔다.

에이든은 바닥에 엎드려 소녀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했다. 그녀가 상자에 거의 다다랐을 때, 에이든은 문득 그녀의 어깨에 매달린 낡은 천 조각에서 무엇인가가 삐져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주 작은, 마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잎사귀 같은 것이었다. 아니, 잎사귀라기보다는… 어린아이의 작은 손가락 같았다.

소녀가 상자를 집어 드는 순간, 그녀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천 조각이 살짝 흔들렸고, 그 틈으로 얼핏 보인 것은… 낡은 천 안에 조심스럽게 싸여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아이는 갓난아기처럼 작았고, 몹시 지쳐 보였다.

에이든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이 죽은 세상에서 살아남고 있었다니.

그 순간, 소녀의 눈동자가 다시 에이든을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에이든은 그녀의 푸른 눈 속에서 어떤 깊은 그림자를 보았다. 생존의 고통, 그리고 어린 존재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의지가 뒤섞인 그림자.

“너는… 아이와 함께 있는 건가?” 에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상자를 단단히 쥐고는 활을 내리지 않은 채 뒤돌아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려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에이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방금 본 어린 소녀와 그녀의 아기가 지울 수 없는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든 그 유물 상자는 대체 무엇일까.

에이든은 천천히 일어섰다. 상자는 사라졌지만, 그 대신 그의 가슴 속에는 새로운 의문이 싹트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이 죽은 세상의 숨겨진 비밀을 향한 작은 실마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는 단순히 식량을 찾는 것 이상의 다른 운명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밖은 여전히 잿빛 하늘 아래, 죽은 듯 고요했다. 그리고 에이든은 다시 이 어둠 속에서 한 걸음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