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이 내려앉은 심산유곡(深山幽谷)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뭇 생명의 소리조차 잠든 듯 고요한 밤. 검은 도포를 두른 사내의 발걸음만이 낙엽 밟는 소리를 간헐적으로 냈다. 사내의 이름은 무영(無影). 천검문의 차기 문주로 촉망받는 이였으나, 지금 그의 얼굴에는 영락없는 연인의 초조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애써 영기(靈氣)를 감추며 숲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매번 찾아오는 길이었건만, 오늘 밤은 유난히 더 불안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영력이 마치 거친 파도처럼 요동쳤다. 금지된 인연. 이 땅의 모든 선인(仙人)들이 혐오하고 부정하는 관계. 바로 그 금기를 무영은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품고 있었다.

한참을 헤쳐 나아가자, 숲은 거짓말처럼 모습을 바꾸었다. 굽이치는 나무들은 거대한 용의 비늘처럼 반짝였고, 바위 틈새에서는 영롱한 빛을 내는 이끼들이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빛의 한가운데, 만월(滿月) 아래 선 듯 찬란한 그림자가 무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느냐, 무영.”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 그러나 그 안에는 덧없는 슬픔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밤하늘처럼 검푸르렀고, 비단결 같은 은발은 허리까지 흘러내려 바람에 흩날렸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그녀는, 요염함 속에 순결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비연(飛燕). 천 년 묵은 구미호였다.

“비연….”

무영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애틋하게 불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의 품은 뜨거웠다. 비연은 무영의 품에 기댄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늦을 줄 알았는데.”
“너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있었던가.”

무영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달빛 아래 드러난 비연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의 뺨에 닿은 무영의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떨렸다.

“오늘… 숲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인간들의 움직임이 느껴져.” 비연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녀의 시선은 숲의 어두운 곳을 향했다.

무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천검문의 정찰대일 것이다. 요 근래, 이 안개골 부근에서 요괴의 기운이 짙게 느껴진다는 보고가 있었다더군.”
“나 때문이냐.”

비연의 목소리에 자조적인 웃음기가 섞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상념이 깃들어 있었다. 종족을 뛰어넘는 인연은 늘 이토록 위태로웠다. 인간에게 요괴는 척결의 대상일 뿐, 사랑의 존재가 될 수는 없었다.

“네 탓이 아니다. 너는 그저… 너일 뿐.” 무영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곳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까지 추적해 들어올 줄이야.”
“나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너도 알지 않느냐. 어지간한 선인들조차 나의 요력을 감지하기 어려울 텐데….”

비연의 눈썹이 미간 사이에서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의 예민한 요력 감지는 보통의 선인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런데도 인간의 기척이 여기까지 닿았다는 것은 단순한 정찰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문득, 고요했던 숲의 기운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던 나뭇가지들이 스산하게 웅성거렸다. 무영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력을 끌어올려 주변을 탐색했다. 쿵, 쿵, 쿵. 심장이 더욱 격렬하게 울렸다.

“무슨 일이지?”
비연 또한 굳은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요력이 옅은 안개처럼 주변을 감싸며 숲의 기운을 탐색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인간의 기척이다. 그것도… 익숙한. 아주 강한 영력을 지닌 자다.”
“강한 영력?”

무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천검문 내에서도 이 깊은 안개골까지 들어올 수 있는 고수는 몇 없었다. 그것이 혹 그의 스승, 혹은 그를 늘 경계하던 장로라면…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비연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이 무영의 도포 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숨어야 해. 아니, 네가 먼저 떠나야 해.”
“무슨 소리냐. 너를 두고 갈 수는 없다!”

무영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품에 안았다. 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 그들이 너와 나의 관계를 알게 되면, 너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네가 이토록 오랫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비연의 목소리가 절규에 가까웠다.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나는 요괴다. 이 세상 그 어떤 인간도 용납하지 않을 존재. 내가 너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는 없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인간들의 대화 소리.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시간을 끌겠다. 그들이 나를 붙잡는다면… 어차피 천벌을 받을 몸이니, 너는 살아남아야 해. 우리의 인연은… 다음 생에서라도.”

비연은 무영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다. 짧고도 뜨거운 입맞춤. 절망과 애정이 뒤섞인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손목에 찬 푸른 옥패를 풀러 무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 이 안에 나의 요력이 담겨 있다. 내가 무사하다면, 옥패가 다시 빛날 거야.”
“비연…!”

무영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비연은 이미 그의 품에서 벗어나 빠르게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요력이 짙은 안개와 뒤섞여 주변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옥패를 움켜쥔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인간의 기척. 무영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도망쳐야 하는 비겁함과, 그녀를 지킬 수 없는 무력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결국, 그는 비연이 만들어 놓은 혼란을 틈타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심장이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이 따랐다. 숲 저편에서 터져 나오는 격렬한 영력의 충돌음과 비명이 그의 귀를 때렸다.

그것은 비연이 그를 위해 벌이는 처절한 사투의 시작이었다.
무영은 옥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옥패는 아직 아무런 빛도 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절망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결의로 물들었다. 반드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설령 이 세상 모든 신선이 그의 적이 된다 할지라도. 그의 심장은 뜨거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복수를 다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