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은 차가운 금속이었고, 피는 메마른 마석 가루였다.
강하람은 잊었다. 뜨거운 심장이 어떻게 뛰었는지, 따뜻한 피가 어떻게 손끝에서 끓어올랐는지. 그 모든 것은 심연의 나락, 그 지옥 같은 구덩이 속에서 재로 변해버렸다. 남은 건 오직 얼음처럼 날카로운 증오와 복수의 칼날뿐이었다.
“하람아, 이 지긋지긋한 심연의 나락, 결국 우리가 해낼 거야.”
이정후. 한때는 하람의 전부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던 사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그들의 모험은 늘 죽음의 문턱에서 춤을 추는 듯 아슬아슬했지만, 서로의 등 뒤를 지키며 언제나 살아 돌아왔다. 정후는 타고난 검사였다. 거친 돌격과 폭풍 같은 칼날로 몬스터의 진형을 부쉈고, 하람은 냉정한 판단과 정교한 마법으로 후방을 지원했다. 그들의 조합은 완벽했다. 적어도 하람은 그렇게 믿었다.
수년 간의 여정 끝에 그들은 마침내 ‘심연의 나락’ 최하층에 도달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용의 심장이 잠들어 있다는 그곳. 붉은 마석으로 뒤덮인 거대한 공간에는 고대의 용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일주일간의 사투 끝에,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간신히 용을 쓰러뜨렸다. 용의 거대한 몸체는 차가운 마석 파편이 되어 흩어졌고, 그 중심에는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는 ‘용의 심장’이 놓여 있었다.
“하람아, 우리가 해냈어! 마침내…!”
정후의 얼굴에는 기쁨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하람 역시 온몸의 고통을 잊고 미소 지었다. 그의 손이 용의 심장으로 뻗어 나가려는 찰나, 등 뒤에서 섬뜩한 냉기가 느껴졌다.
콰앙!
잔혹한 굉음과 함께 하람의 등짝에 불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균형을 잃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대한 균열이 난 바닥, 그 아래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다. 하람의 눈에 비친 건, 광기 어린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정후의 눈이었다.
“미안하다, 하람아. 하지만 이 용의 심장은… 나 혼자 가져야만 해. 네가 있으면… 나눌 수밖에 없잖아.”
정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명확해서, 하람은 이 모든 것이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등 뒤의 통증과 몸이 추락하는 감각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하람의 손이 허공을 갈랐지만, 정후는 이미 한 발짝 물러나 용의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정…후…!”
하람의 절규는 심연의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몸은 한없이 추락했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지는 고통이 온몸을 뒤덮었다. 정신이 희미해지는 순간, 그는 정후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이 영광은…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거야. 너는… 이제 방해물일 뿐.”
그것이 하람이 들은 마지막 인간의 목소리였다.
* * *
하람은 죽지 않았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끝없이 추락하던 몸은 심연의 가장 깊은 곳, 태초의 마나가 잠들어 있는 공간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고통도, 시간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끝없는 어둠과 차가운 마나의 흐름만이 그를 감쌌다. 부서진 육체는 마나에 침식되었고, 상실된 정신은 증오로 채워졌다. 그의 내면에서 빛나던 모든 것이 꺼지고, 오직 복수라는 단 하나의 불꽃만이 타올랐다.
수십 번, 수백 번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어둠 속에서 마나를 흡수하고, 변이된 괴물들과 싸우며 살아남는 법을 익혔다. 그의 마법은 더 이상 정교한 후방 지원술이 아니었다. 그림자처럼 적을 잠식하고, 영혼을 파괴하는 끔찍한 주술이 되었다. 그의 육체는 마석처럼 단단해졌고, 그의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고 차가워졌다. 온몸에 난 상처와 마나의 흔적은 그를 예전의 하람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강하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심연의 그림자’였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온 하람은 밖의 세상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옛 친구, 이정후는 ‘빛의 성기사’라는 칭호를 얻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용의 심장을 손에 넣어 막강한 힘을 얻었고, 그 힘으로 수많은 던전을 정복하며 백성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의 이름은 영웅의 전설로 기록되었다.
“영웅이라….”
하람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영웅의 손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람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소리 없이 정보를 모으고, 정후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렸다. 완벽한 복수를 위한, 단 한 번의 기회를.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영웅’ 이정후가 새로운 던전 ‘잊혀진 왕국의 금고’를 공략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십 년간 미개척 상태로 남아있던 최고 난이도의 던전. 정후는 이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하여 자신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하려 했다. 수많은 고위 탐험가들이 그의 원정에 동행했다. 하람은 그들 속에 위장하여 스며들었다.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린 채, 그는 ‘무명의 그림자술사’로 불렸다.
던전의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하람의 심장은 차가운 격정으로 타올랐다. 잊혀진 왕국의 금고는 복잡한 미로와 치명적인 함정, 그리고 강력한 몬스터들로 가득했다. 정후는 예전처럼 화려한 검술로 선두에 섰고, 그의 주변에는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기사들이 따랐다. 하람은 그들의 뒤편, 그림자 속에서 냉정하게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는 정후가 방심하는 틈을 기다렸다. 던전의 가장 깊은 곳, 고대의 마나로 가득 찬 봉인된 보물고 앞에서였다. 문을 열기 위한 마지막 퍼즐을 풀기 위해 정후가 잠시 전력에서 이탈한 순간, 하람은 움직였다.
스르륵-
어둠이 하람의 몸을 감쌌고, 그는 순식간에 정후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림자에 정후가 뒤늦게 인기척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다.
“크윽!”
하람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나 사슬이 정후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정후는 저항하려 했지만, 사슬은 그의 온몸을 조여들어 움직임을 봉쇄했다. 주변의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하람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그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누, 누구냐! 감히 영웅을 해치려 드는가!”
한 기사가 용기 있게 외쳤지만, 하람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의 검은 로브가 스르륵 벗겨지면서, 상처투성이의 얼굴과 심연 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순간, 정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하… 하람…?”
정후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그의 눈에는 공포가 서렸다.
“오랜만이다, 친구여. 오랜만에 보는데…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가?”
하람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죽은 자의 목소리 같았다.
“말도 안 돼… 너는 그때… 심연의 나락에서… 분명…!”
“죽었어야 했지. 네가 바란 대로.” 하람은 정후의 멱살을 잡고 거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난 살아 돌아왔다. 네가 버린 그 심연에서, 너를 죽이기 위해.”
정후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의 몸에서 ‘용의 심장’이 부여한 빛이 뿜어져 나왔지만, 하람의 검은 마나 사슬은 그 빛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거짓말…!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용의 심장이 너무 강력해서… 나도 모르게…!”
“입 다물어라.”
하람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정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쩔 수 없었다고? 네 탐욕 때문에, 너의 영광을 위해 나를 짓밟고 버려두고 갔던 네가…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건가?”
하람의 눈빛은 살기로 번뜩였다. 주변의 기사들은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그들은 영웅 이정후가 이토록 무력하게 제압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네가 던진 그 심연 속에서, 나는 매일 밤 네 얼굴을 보며 죽어갔다. 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너에 대한 증오만이 나를 살게 했다. 너는 영웅이 되었지만, 나는 괴물이 되었다. 네 손에 의해.”
하람의 말은 정후의 심장을 꿰뚫는 비수와 같았다. 정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줘, 하람아…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준다고?” 하람이 비웃었다. “네가 내게 남긴 건 오직 죽음과 고통뿐이었다. 이제 내가 네게 그것을 돌려줄 차례다.”
하람의 손에서 검은 마나가 폭주하듯 뿜어져 나왔다. 마나는 정후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정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용의 심장 에너지가 검은 마나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정후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영웅다운 외형이 점점 끔찍하게 변해갔다. 피부는 갈라지고, 눈은 충혈되었으며, 그의 생명력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네가 내게 남긴 지옥이다. 네가 나를 던져 넣었던 그 고통을… 너도 똑같이 느껴봐야지.”
하람은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후의 눈빛에서 삶의 빛이 사라져 갔다. 그의 몸은 검은 마나에 완전히 뒤덮였고, 이내 한 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마지막 순간, 정후의 입술에서 찢어질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하람은 한 손에 남아있는 정후의 재를 쥐고, 천천히 바닥에 뿌렸다. 그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냉정하고 잔혹했다. 그의 눈에는 어떤 망설임도, 후회도 없었다. 오직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복수는 끝났다. 하지만 하람은 어떤 해방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차가운 금속이었고, 피는 메마른 마석 가루였다. 그는 영웅을 죽인 괴물이 되었지만, 그 괴물의 내면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검은 로브를 다시 뒤집어쓴 하람은 조용히 던전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발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가 남긴 것은 오직 영웅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전설과, 아무도 모르는 심연의 그림자였다. 그는 더 이상 복수를 위해 살지 않았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끝없는 던전의 미로 속에서, 영원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