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낙원
## 1화. 죽은 도시의 숨결
태양은 잿빛으로 멍든 하늘 너머,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겨우 느껴지는 희미한 얼룩에 불과했다. 발밑의 땅은 더 이상 흙이 아니었다. 메마른 모래와 깨진 콘크리트 조각,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재가 뒤섞여 발걸음마다 끈적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강훈은 익숙하게 숨통 여과기의 필터를 점검했다. ‘젠장, 이제 하나 남았군.’ 그의 굵은 손가락이 낡은 기계를 더듬었다. 삭막한 황무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고, 호흡을 보장하는 것은 이 낡은 장비와 그 안에 들어갈 새 필터였다.
폐허가 된 도시의 골목을 따라 걷는 그의 발자국은 옅게, 그러나 선명하게 남았다. 한때 번화했을 거리는 기형적으로 솟아오른 건물 잔해와 무너진 상점 간판들의 묘지였다. 삐걱이는 금속음이 바람에 실려와 귀를 때렸다. 어디선가 작은 모래폭풍이 일어났는지, 멀리서 붉은색 먼지 기둥이 하늘을 뚫을 듯 치솟고 있었다. 놈들의 서식지에서 피어나는 먼지 기둥은 언제나 불길한 징조였다.
“또 시작이군.”
강훈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그만큼 세상에 대한 체념이 짙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달랐다. 생존을 향한 짐승 같은 투지가 그 안에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등 뒤에는 녹슨 파이프를 개조한 산탄총이 매달려 있었고, 허리춤에는 전투용 칼과 몇 개의 탄창, 그리고 작은 배낭이 전부였다. 이것이 그의 모든 생존 수단이었다.
오늘은 꽤 멀리 나왔다. 재활용 가능한 부품이나, 운이 좋으면 식수 정화 장치에 필요한 새 촉매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거처는 이 도시에서 남쪽으로 반나절을 더 걸어야 나오는,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지하 벙커였다. 그곳의 장비들은 모두 강훈의 손끝에서 간신히 돌아가고 있었다. 특히 식수 장치는 요즘 들어 영 시원찮았다.
낡은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철골 잔해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스타라이트 백화점.’ 이름만 번지르르한 간판이 절반쯤 떨어져 나간 채로 흔들거렸다. 강훈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놈들의 활동이 뜸한 지역이었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폐허가 된 공간에서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부는 암흑 그 자체였다. 그의 머리에 장착된 전술 라이트가 어둠을 갈랐다. 먼지가 가득한 공기 속으로 빛줄기가 춤을 추자, 무너진 천장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번들거렸다. 진열대는 뒤집혔고, 앙상한 마네킹들은 팔다리가 부러진 채 기괴한 형상으로 서 있었다. 한때 소비와 환락의 중심지였던 곳은 이제 죽음의 전시장 같았다.
강훈은 발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바닥에 흩뿌려진 잔해들을 피해가며,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쿵, 쿵. 심장이 제 존재를 알리듯 가슴 속에서 두근거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고요함이 익숙해진 것은. 어쩌면 고요함보다 더 섬뜩한 것은, 아주 작은 소리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이쪽은 꽝이군.”
지하 1층까지 내려갔지만, 쓸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찢어진 옷가지와 플라스틱 조각들, 그리고 이미 부식되어 버린 금속들이 전부였다. 오히려 그는 몇 번이나 바닥에 널린 뼈들을 밟을 뻔했다. 오래전에 죽은 자들의 흔적은 이 도시 어디에나 있었다.
다시 지상층으로 올라와 다른 구역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식료품 코너였던 곳에는 썩어버린 잔해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균류들이 검붉게 피어 있었다. 역겨운 냄새가 필터로 걸러지는 공기마저 오염시키는 듯했다. 강훈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무너진 벽 뒤편,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문이 하나 보였다. ‘비상 발전실’.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강훈은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갔다. 강철 문은 녹슬어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지하 깊숙이 있어 대재앙의 여파를 덜 받은 모양이었다.
문손잡이를 잡고 비틀자,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겨우 열렸다. 안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오랫동안 갇혀 있던 퀴퀴한 공기가 훅 끼쳐 나왔다. 강훈은 마스크 너머로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전술 라이트를 비추자, 안쪽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먼지는 쌓여 있었지만, 벽면에 설치된 제어판과 거대한 발전기들이 그대로 보였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이건 대박인데?’ 발전기는 이미 수명이 다했겠지만, 그 안에 들어가는 부품들은 다를 수 있었다. 특히 전력을 저장하는 배터리 셀은 이 폐허에서 금보다 귀한 자원이었다.
강훈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발전기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쓸 만한 부품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의 손이 낡은 패널을 더듬었다. 마침내, 그의 손끝에 닿은 것은 아직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는 배터리 셀이었다. 그것은 그의 장비들을 다시 가동시킬 수 있을 만큼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이거야!”
환호성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텅 빈 발전실 벽면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음. 끼이이익─. 그것은 결코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강훈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산탄총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오는 소리지? 그의 라이트가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놈이었다.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천장의 환풍구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그림자 같았다. 검고 앙상한 몸뚱이, 여덟 개의 길고 가느다란 다리, 그리고 기형적으로 변형된 머리통. 섬뜩하게 빛나는 붉은 눈 두 개가 강훈을 향해 맹렬한 살기를 뿜어냈다.
‘그림자 사냥꾼.’
강훈은 그 즉시 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 폐허에서 가장 은밀하고 치명적인 돌연변이 생명체. 놈들은 소리 없이 먹잇감에게 접근하여, 한순간에 숨통을 끊어놓는 지독한 사냥꾼들이었다. 분명 발전실 문을 열었을 때 새어 나간 냄새를 맡고 숨어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림자 사냥꾼은 낮은 포효를 내뱉으며 바닥을 기듯이 강훈에게 달려들었다. 강훈은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쾅! 산탄총의 불꽃이 어둠을 잠시 밝혔고, 좁은 공간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납탄이 놈의 몸통에 박혔지만, 놈은 잠시 휘청거릴 뿐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놈들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놈이 맹렬하게 점프하며 강훈의 얼굴을 향해 앞다리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갈랐다. 강훈은 몸을 숙여 겨우 피했지만, 마스크 일부가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찢어진 틈으로 유독한 공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함께 숨이 막혔다.
“젠장!”
강훈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발전실 안쪽은 복잡한 기계들로 가득했다. 이것은 싸움에 유리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림자 사냥꾼은 후각이 뛰어나지만, 동시에 빛에 민감했다.
강훈은 재빨리 비상 발전기 중 하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이 다시 달려드는 순간, 강훈은 몸을 숙여 기계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림자 사냥꾼은 강훈이 숨은 기계 위로 뛰어올랐다. 거대한 기계가 삐걱거렸다. 놈은 강훈이 숨은 곳을 향해 앞다리를 쑤셔 넣으려 했다.
바로 그때, 강훈은 허리춤의 나이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기계 반대편으로 몸을 굴려 빠져나왔다. 동시에 라이트의 초점을 최대로 모아 놈의 붉은 눈을 향해 비췄다. 놈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 기회다!”
강훈은 거리를 벌리는 동시에 놈의 약점, 즉 눈을 노리고 다시 산탄총을 발사했다. 콰앙! 이번에는 놈의 머리통에서 섬뜩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놈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고, 다리 하나가 잘려 나가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놈은 기어코 몸을 일으켜 강훈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강훈은 남은 한 발을 놈의 심장으로 조준했다. 놈의 심장은 여러 개로 나뉘어 있었지만, 가장 큰 핵은 언제나 가슴 중앙에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그의 귀에 이 폐허에서는 도저히 들릴 수 없는,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삑— 삐비빅—.”
그것은 그의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신호음이었다. 간섭이 심한 이 죽은 도시에서, 무전기는 언제나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로부터의 신호? 믿을 수 없었다.
강훈은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놈을 완전히 제압해야 했다. 하지만 저 신호는?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살아 있는 자의 목소리일 수도 있는 희망의 메아리였다.
그 짧은 찰나의 망설임이 치명적이었다. 그림자 사냥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번 강훈에게 돌진했다. 놈의 마지막 발버둥은 필사적이었다. 강훈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다시 한번 산탄총을 겨눴다. 무전기 신호는 점멸하며 강훈의 손목에서 애타게 울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 눈앞의 적부터 처리해야 한다. 희망은 살아남은 자에게만 허락되는 사치였다. 콰앙! 마지막 한 발이 터지며, 그림자 사냥꾼은 비로소 쓰러졌다. 축 늘어진 몸뚱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강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욱신거렸다. 마스크의 찢어진 틈새로 들어온 유독한 공기 때문에 목이 칼칼했다. 그는 빠르게 남은 배터리 셀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발전실을 빠져나왔다.
무전기 신호는 여전히 미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주파수를 맞췄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작고, 너무나 희미해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들리세요?…… 여기에…… 사람이…….”
목소리는 간헐적으로 끊겼지만, 강훈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그는 찢어진 마스크를 움켜쥐었다. 필터는 이제 단 하나뿐이었다. 이 넓고 황량한 세상에서, 자신 외에 살아남은 사람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함정일 수도 있었다. 놈들이나 약탈자들이 살아남은 자들을 유인하는 교활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강훈은 폐허의 입구에 서서, 멀리서 불어오는 붉은 모래폭풍과 아직도 희미하게 울리는 무전기 신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스크 아래로 그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과연 저 신호는 희망일까, 아니면 더 큰 절망으로 이끄는 덫일까.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만약 저 신호가 진짜라면,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의 유일한 의무였다. 그는 망설임 끝에, 무전기 신호가 오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마스크 사이로, 세상의 독기가 그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