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아파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묵은 복도 끝, 현관문은 다른 집들보다 유난히 낡고 긁힌 자국이 많았다. 녹슨 손잡이를 돌려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도배를 새로 하고 낡은 가구들을 들여놓아도, 어딘가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음습한 기운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싼값에 도심 한가운데에서 이런 넓이의 아파트를 구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었다. 지혜는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썼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할 때면, 부엌에서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고양이 한 마리 키우지 않는 집에서 접시라도 깨진 듯한 소음. 지혜는 피곤에 절어 환청이라 생각했다. 피로가 쌓이면 늘 그렇듯 예민해진 탓이겠거니 했다.
어느 날은 분명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열쇠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참을 찾아 헤매다 거실 바닥에 뒹구는 열쇠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누군가 던져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이게 뭐지?” 지혜는 찜찜함을 애써 떨쳐내며 열쇠를 다시 제자리에 걸었다. 하지만 다음 날, 열쇠는 또다시 신발장 위에 놓여 있었다.
“농담이 심하네.” 지혜는 피식 웃었다. 자신이 잠결에 옮겨놓았을 리는 만무했다. 기억 상실이라도 온 걸까? 그녀는 어쩐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들은 점차 빈번해지고 대담해졌다. 샤워를 하던 중 수도꼭지가 멋대로 잠기거나, 분명히 닫아둔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새벽녘,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누군가 쿵, 쿵, 쿵 발소리를 내며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지혜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숨을 죽인 채 문에 귀를 대면, 희미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소리는 분명 인간의 목소리였다.
“밤새도록 잠 한숨 못 자고 이걸 봐야 한다니.”
지혜는 다크서클이 짙어진 얼굴로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 속 그녀의 눈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거울 속 지혜가 자신보다 먼저 눈을 깜빡였다. 아니, 착각인가? 그녀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거울 속 지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소름이 쫙 끼쳤다. 지혜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거울은 다시 평범한, 그저 평범한 거울로 돌아와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가 봐.”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되자, 지혜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했다. 친구는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며, 주말에 바람 쐴 겸 본가에 내려가거나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권했다.
“아니야, 진정해. 그런 건 다 피곤해서 그래. 잠도 제대로 못 잤다며?”
친구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지혜는 외려 더 고립감을 느꼈다. 이 모든 기괴한 현상들이 단지 피곤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녀는 정말 미쳐가는 걸까?
밤이 되자 아파트는 더욱 음침해졌다. 벽에 걸린 액자들이 제멋대로 기울거나 떨어졌고, 전등은 깜빡이다 아예 나가버리기도 했다. 냉장고 문이 덜컥거리며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했고, 주방 찬장에서는 접시들이 저절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리는 그녀의 머릿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밤, 가장 기괴하고 섬뜩한 일이 벌어졌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스탠드 조명이 스스로 켜졌다. 희미한 불빛 아래, 벽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벽 안에 무언가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지혜는 눈을 비볐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벽지는 마치 피부처럼 팽창했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했다.
“악!”
지혜의 비명과 동시에 벽 한가운데가 불룩 솟아올랐다. 마치 거대한 주먹이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 솟아오른 부분에는 이빨 자국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고, 그 틈으로 끈적하고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체는 벽지를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고였다. 그 광경은 마치 아파트 자체가 살아있는 거대한 괴물인 것 같았다.
“나가야 해… 여기서 나가야 해!”
지혜는 침대에서 뛰쳐나와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잡고 비틀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굳게 잠겨 있었다. 분명 잠그지 않았는데? 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돌리고 발로 문을 걷어찼지만, 문은 마치 벽의 일부처럼 견고했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의 조명들이 떨어져 내리고,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하지만 외부의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 파편들은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듯 공중에서 한동안 멈춰 있었다.
“뭐야… 이게 무슨…”
지혜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실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가구들이 제멋대로 날아다니고, 바닥은 끊임없이 진동했다. 그리고 아까 벽에서 흘러내리던 검붉은 액체가 바닥을 타고 그녀에게로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액체는 흐르는 동안 모양을 바꾸며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렸다.
공기 중에는 끔찍한 비린내와 썩은 내, 그리고 금속이 타는 듯한 냄새가 뒤섞여 지혜의 코를 찔렀다.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때, 아파트 전체에서 깊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는 벽에서, 바닥에서, 천장에서, 모든 곳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마치 아파트 자체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널… 기다렸다…”
지혜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녀의 뇌리에 직접 박히는 듯 선명했다. 목소리는 고통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검붉은 액체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액체는 차갑고 끈적했으며, 마치 살아있는 점액처럼 발목을 감쌌다. 지혜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액체는 더욱 조여들었다. 그녀의 몸은 점차 무거워졌고, 공기마저 액체처럼 끈적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지혜의 눈앞에는 아파트의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였다. 벽은 숨을 쉬고, 가구들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천장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이곳이 더 이상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만 깨달았다.
어둠이 그녀를 삼켰다. 검붉은 액체가 턱까지 차오르고, 지혜는 마지막 숨을 내쉬며 절규했다. 그녀의 비명은 아파트의 끔찍한 울림 속에 묻혀 사라졌다.
아침 햇살이 아파트 창문을 비췄다. 깨진 유리창 사이로 들어온 빛은 고요하게 먼지 속을 떠다녔다. 거실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했다. 깨진 액자나 쓰러진 가구는 없었다. 그저 어제와 다름없는, 조금 낡은 아파트의 모습이었다.
경비원이 순찰을 돌다 지혜의 집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라, 잠그고 갔나?”
경비원은 문을 살짝 밀어 보았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안은 적막했다. 경비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외출했나? 그는 문을 다시 닫고 돌아섰다.
문이 닫히자, 거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테이블 위, 어젯밤 분명히 깨졌던 유리컵이 온전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컵 안에는 끈적하고 검붉은 액체의 흔적이 희미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치 누군가 무심코 벗어놓은 것처럼, 지혜의 열쇠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아파트는 오늘도,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