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재가 된 세상에서 눈을 뜨다
목덜미에 차가운 칼날이 닿았다. 아니, 칼날이 아니라… 키보드 위에서 미끄러진 나의 머리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엑셀 파일 속 빼곡한 숫자들, 그리고 터져 나오는 동료들의 비명소리. 그게 전부였다. 어이없게, 너무나도 비루하게, 내 스물아홉 인생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럴 리가 없지.
김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 건 지독한 갈증과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이었다. 그리고 코끝을 찌르는 퀴퀴한 냄새. 흙먼지, 곰팡이, 그리고… 쇠비린내가 뒤섞인 불쾌한 악취. 분명 내 방 침대 위는 아니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바닥, 등 뒤로 느껴지는 거친 흙벽. 꿈인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잿빛 하늘과, 하늘을 향해 삐죽삐죽 솟아있는 기형적인 건물 잔해들이었다. 회색빛 먼지가 공기 중에 가득했고,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뼈대처럼 앙상하게 서 있었다. 태양이 있긴 한 건지, 전체적으로 어둑어둑한 풍경이었다. 폐허. 한눈에 봐도 그랬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버려진 세상.
“젠장…!”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몹시 건조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사람처럼 온몸의 수분이 증발한 느낌이었다. 팔을 들어 얼굴을 비볐다. 마른 입술이 쩍쩍 갈라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내 손은 왜 이렇게 더러운 거지?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흙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손톱 사이에는 때가 가득했다. 이건 내 손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출근 전에 깨끗하게 씻었던 그 손은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관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뼈마디가 전부 어긋난 것 같은 통증.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자,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내가 누워있던 곳은 무너진 건물의 지하로 보이는 곳이었다. 흙벽은 여기저기 균열이 가 있었고, 천장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웠다. 곳곳에 널브러진 철근과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 그리고 이름 모를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한때 사무실이었던 곳인가? 낡은 서류뭉치들이 흩어져 있었고, 부서진 의자 프레임이 나뒹굴었다.
“이게… 대체… 뭐야?”
혼잣말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죽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시 내 방 침대에서 깨어난 것도 아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이세계 전생? 웃기지 마. 누가 이런 지옥 같은 곳으로 전생을 시켜줘? 내가 살던 곳은 매일 아침 출근길 지옥철에 시달리고, 점심시간마다 뭘 먹을지 고민하는 평범한 세상이었다. 주말엔 뒹굴거리며 웹툰이나 보던 그런 곳.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생존. 두 글자가 머릿속을 강렬하게 울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갈증이 너무 심해서 입안이 바싹 말랐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물… 물 좀…”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주위를 헤치고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듯 어색했다. 마치 오래된 기계가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옷은 또 뭐야? 누더기가 된 옷을 내려다봤다. 칙칙한 회색빛의 섬유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곳곳에 말라붙은 핏자국까지. 소름이 돋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세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가장 급한 건 생존. 물. 음식. 안전한 곳.
발을 떼어 한 걸음 내디뎠다. 바닥에 깔린 자갈과 흙먼지가 발에 밟히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있던 곳은 지하 공간이었고, 한쪽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지상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좁고 어두운 통로. 망설일 틈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통로를 따라 몇 걸음 걸었을까. 희미한 빛이 보였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미지의 공포가 밀려들었다. 빛이 있는 곳은 곧 위험이 도사릴 수도 있는 곳이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기어갔다.
밖으로 나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경악스러웠다. 황량함. 폐허.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부족한 처참한 광경이었다. 잿빛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건물 잔해들이 무덤처럼 솟아 있었다. 먼지바람이 불어와 흩날리는 모래와 흙먼지 속에서, 한때 화려했을 도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녹슬고, 부서지고, 색이 바래 있었다. 길바닥에는 찢어진 옷가지와 쓰레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어디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철골 구조물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뺨을 스쳤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다. 태양은… 저 위에 희미하게 보이는 저것이 태양인 걸까? 붉고 흐릿한 원반이 잿빛 구름 뒤에 숨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꿈일 거야. 누군가 나를 골탕 먹이려고 만든 정교한 세트장일 거야. 하지만 입안을 쩍 갈라놓는 갈증, 온몸을 쑤시는 통증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멀리서,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소리였을까?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지만, 부서진 건물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 소리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협감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렸다.
나는 살아남아야 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이상, 이 낯선 세상에서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물 한 모금, 음식 한 조각 없는 이곳에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발치에 무언가 빛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파묻힌 채 녹슬어 있는 금속 조각이었다. 마치 얇은 판처럼 생긴 그것은, 한쪽 모서리가 날카롭게 깨져 있었지만, 표면은 묘하게 빛을 띠고 있었다. 호기심에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였다. 자세히 살펴보자, 표면에 희미하게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순간, 금속 조각에서 푸른빛이 깜빡이더니, 내 손안에서 맥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정보가 흘러들어오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마치 비어있던 내 정신에 뭔가가 채워지는 느낌.
*…경고. 생체 에너지 부족. 긴급 활성화 모드 진입.*
*생존 정보 업데이트 시작…*
*…주변 환경 스캔 중.*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 머릿속에서 들리는 음성. 마치 기계음처럼 차갑고 명료했다. 금속 조각을 든 손이 덜덜 떨렸다.
환청인가? 아니, 너무나도 선명했다. 게다가 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마자, 주변의 모든 정보들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너진 건물들의 구조, 흙먼지의 조성, 멀리서 들리는 소리의 진원지, 심지어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입자들까지… 마치 모든 것이 선명한 데이터로 변환되어 머릿속에 각인되는 듯한 착각.
그때, 저 멀리, 폐허 속을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보였다. 크고 굵은 형체. 확실히 인간은 아니었다. 짐승 같았다. 기이하게 울퉁불퉁한 실루엣은 마치 육중한 짐승이 여러 개의 다리로 기어가는 것 같았다. 녀석의 시선이 마치 나를 꿰뚫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짐승이 나를 향해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위험 감지. 접근 중인 생명체. 생체 지표 분석 중…*
머릿속 음성은 계속됐다. 본능적으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저것은… 내가 알던 세상의 짐승이 아니었다.
김현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러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녹슨 금속 조각을 꽉 쥔 채, 잿빛 세상의 첫 번째 위협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생존 본능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