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도시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지 오래였다. 천장은 사라지고 하늘은 언제나 칙칙한 주황색과 기괴한 녹색이 뒤섞인 해괴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먼지는 사방을 덮고, 썩어가는 고층 건물들은 뼈대만 남아 비틀린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거나, 아니면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버린 후였다.
지혁은 더 이상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았다. 이곳에는 오직 어스름한 새벽 같은 시간만이 영원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찌그러진 강철 파편과 녹슨 전선으로 겨우 막아놓은 지하실 입구를 걷어내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코를 찌르는 역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흙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비린내가 뒤섞여 그의 폐부를 긁었다. 늘 그렇듯, 목은 갈증으로 바싹 말라 있었고, 위장은 허기로 꼬여 울부짖었다.
오늘도, 생존이었다.
“젠장…”
그는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비친 도시는 마치 살아있는 시체 같았다. 시시때때로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들은 폐허의 적막을 깨트렸고, 땅 밑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촉수 같은 식물들이 콘크리트 벽을 타고 기이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그것들은 빛을 향해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곳의 빛은 그저 더 큰 어둠의 변형일 뿐이었다.
배낭을 단단히 고쳐 맨 지혁은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녹슨 쇠파이프와 언제 고장 날지 모르는 손전등뿐이었다.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도시 외곽의 폐기된 쇼핑몰. 한때 사람들이 북적였을 그곳은 이제 거대한 흉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먹을 것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 아니, 착각 – 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 깔린 유리 조각들이 ‘차그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소리는 이 고요한 폐허에서 지나치게 크게 울려 퍼졌다. 지혁은 숨을 죽였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그것들’은 소리에 민감했다. 살점이 썩어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피부에, 비정상적으로 길고 가는 팔다리를 가진 그것들은 어둠 속에 숨어 사람의 온기를 찾아 헤매곤 했다. 그것들을 마주치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또는, 더 끔찍한 무언가.
쇼핑몰 입구에 다다르자, 건물 전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고, 입구를 지탱하던 거대한 대리석 기둥은 균열이 가고 녹색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지혁은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비췄다. 흙먼지가 부유하는 어둠 속에서, 한때 화려했을 옷가지들이 걸린 마네킹들이 텅 빈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뜩했다.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
그는 빈 진열대를 뒤지고, 쓰러진 선반을 들어 올렸다. 썩어버린 옷가지들과 바싹 마른 과자 봉지 몇 개가 전부였다. 희망은 점점 바닥으로 떨어져 갔다. 지혁은 무너진 천장 사이로 보이는 기괴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알 수 없는 색의 하늘은 때때로 섬광처럼 번쩍이며, 잠시 동안 도시 전체를 보라색이나 피처럼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그때마다 지혁은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언어 같기도, 아니면 그저 날카로운 쇳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그의 뇌를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안 돼… 오늘은 안 돼…”
그는 손으로 귀를 막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들은 그를 미치게 할 작정인 것 같았다. 지혁은 무언가에 홀린 듯 쇼핑몰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성은 그만두라고 외쳤지만, 그의 몸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마치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것처럼,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걸어갔다.
갑자기, 그의 발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쇼핑몰의 어둠 속에서 섬뜩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림자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수십 개의 팔다리가 엉겨 붙어 만들어진, 형체 없는 덩어리 같았다. 냄새가 났다. 썩은 살점과 곰팡이, 그리고 철이 타는 듯한 역한 냄새.
지혁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쇠파이프를 다시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림자 속의 존재는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것은 형태가 계속 변하며 그의 눈을 속였다. 한순간은 거대한 곤충 같았다가, 다음 순간에는 사람의 팔다리가 뒤엉킨 채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덩어리 사이로,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들이 그를 향해 번뜩였다.
“크르르…”
그것은 인간의 목에서 나올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소리는 그의 뇌를 직접 긁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지혁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으스스한 빛이 쇼핑몰의 잔해 사이로 스며들었다. 기괴한 하늘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었다. 그 빛은 어둠 속의 존재를 비추었고, 지혁은 순간적으로 그 전체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그것의 형태를 인지하려 했지만, 이성은 그것을 거부했다. 그것은 비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였다. 수십 개의 뒤틀린 관절과 가시, 그리고 흐느적거리는 살덩이가 한데 뭉쳐진 채, 그것은 그의 눈을 향해 거대한 입을 벌렸다. 입 안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공포가 지혁을 덮쳤다. 그는 그것이 내뿜는 악취와 환각적인 형태에 구토를 할 것 같았다.
“이… 이건…”
그는 헛구역질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거대한 존재는 그에게로 돌진했고, 지혁은 순간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보았지만, 그건 마치 거대한 암벽에 돌멩이를 던지는 것과 같았다.
‘콰앙!’
그의 시야가 흔들렸다. 존재의 팔다리가 휩쓸고 지나가며, 지혁은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쇠파이프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의 몸에선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존재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셀 수 없는 눈동자로 그를 꿰뚫어 보았다. 지혁은 그 눈동자 속에서 우주만큼이나 거대한 공허와, 인간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광기를 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다시 한번 하늘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더욱 강렬한, 마치 세상의 끝을 알리는 듯한 섬광이었다. 지혁의 눈앞의 존재가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그 찰나의 순간, 지혁은 모든 것을 포기하려다가도, 다시 한번 삶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손을 뻗어 몸부림치며, 떨어져 있던 녹슨 쇠파이프를 겨우 움켜쥐었다.
‘지금이 아니면… 끝장이다.’
그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다. 존재의 뒤틀린 몸체가 다시 그에게로 향하는 순간, 지혁은 모든 것을 걸고 쇠파이프를 힘껏 던졌다. 파이프는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존재의 비정상적인 눈동자 중 하나를 강타했다.
‘끼이이익!’
인간의 귀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쇼핑몰을 가득 채웠다. 존재는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고, 그 몸뚱이에서 검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잠시 동안 움직임을 멈추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지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부러진 갈비뼈의 고통도 잊은 채, 기어서라도 쇼핑몰 입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폐는 터질 것 같았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겨우 지하 대피소로 돌아왔다. 입구를 막아놓은 잔해들을 다시 밀어 넣자,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어둠 속에서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렸다.
“젠… 장… 젠장…”
그는 이를 악물었다. 팔다리에 힘이 풀리고 온몸이 경련하는 것 같았다. 쇼핑몰에서 보았던 그 알 수 없는 존재의 형체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눈동자, 그 비명 소리, 그 썩은 냄새. 그의 정신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다시 살아남았다. 왜? 무엇 때문에? 그 질문은 언제나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답은 없었다. 그는 그저 살았다. 아무런 의미도, 희망도 없는 이 황폐한 세계에서, 그는 그저 다음 순간을 위해 버텨냈다.
그는 부러진 갈비뼈를 움켜쥐고,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배낭 속에서 더 이상 효과가 없는 오래된 진통제를 꺼내 삼켰다. 그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미쳐 날뛰고 있었고, 그는 그 한가운데에 던져진 작은 파편에 불과했다.
내일, 그는 또다시 밖으로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으니까…”
그는 텅 빈 공간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잿빛 도시의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이 끔찍한 생존 본능뿐이었다. 그리고 그 본능이 이끄는 한, 그는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의 끝을 마주할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