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죽었다. 한때 푸른 영기가 넘실대던 강산은 이제 잿빛 먼지와 금이 간 대지로 변해버렸다. 태고의 재앙이 휩쓸고 간 지 수백 년, 남아있는 건 절망과 메마른 숨결뿐이었다. 서진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황량한 평원을 가로질렀다. 그의 눈동자는 굳건했으나, 그 안에는 깊은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젠장… 이제 정말 바닥인가.”
그의 주머니 속 영석(靈石) 조각은 손톱만 한 크기가 전부였다. 한때 수련자들의 생명줄이었던 영석은 이제 닳고 닳아 그 효능조차 미미했다. 겨우 버티고 있는 결단경(結丹境) 초기 수준의 영력(靈力)은 시시때때로 그의 전신을 꿰뚫는 고통과 공허함에 시달리게 했다. 세상의 영기가 고갈되면서, 수련의 길은 곧 고통의 길이자 죽음의 길로 변모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끝없는 폐허뿐이었다. 저 멀리, 한때 신선들이 거닐었다는 봉우리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곳마저도 이제는 영수를 사냥하는 자들과 영석을 찾아 헤매는 망자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서진은 낡은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세상의 마지막 영맥(靈脈)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의 지도였다. 물론 지도의 대부분은 훼손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는 표식들조차 지금의 폐허에서는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이었다.
“서남쪽… 영수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라. 아직까지 그곳에 발을 들인 자는 없다고 했지.”
영수의 무덤. 살아남은 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퍼져 있는 금단의 땅이었다. 그곳의 영수들은 다른 곳의 영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나움과 흉포함을 지녔다고 했다. 영기가 희박한 이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니,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며칠 전 겨우 사냥한 이등 영수(靈獸)의 고기마저 이제는 다 떨어져 갔다. 굶주림은 영력 고갈만큼이나 수련자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가는 수밖에.”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잿빛 대지 위로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며칠을 더 걸었을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 그 자체였다. 거대한 협곡이 대지를 찢어발긴 듯 놓여 있었다. 협곡의 벽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영수들의 뼈들이 박혀 있었고, 땅바닥에는 기괴한 형태로 뒤틀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나무들은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푸석한 잎사귀들을 매달고 있었다. 영수의 무덤, 이곳이 분명했다.
협곡으로 들어서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그를 감쌌다. 낡은 방한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몸이 떨렸다. 동시에, 희미하지만 확실한 영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다른 곳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아주 미세한 영기의 파동이었다. 서진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스쳤다.
그때였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서진의 시야를 가렸다. 뼈마디가 드러난, 거대한 해골 전갈이었다. 여섯 개의 다리는 날카로운 칼날 같았고, 꼬리에는 독액이 뚝뚝 떨어지는 거대한 침이 달려 있었다. 이등 영수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혹은 삼등 영수에 근접한 개체였다.
“이런… 벌써부터인가.”
서진은 황급히 허리춤의 낡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영력이 고갈된 세상에서 그나마 효능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법보(法寶) 중 하나였다. 그의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파영검(破影劍)’이었다.
해골 전갈은 기다리지 않았다. 거대한 몸을 튕겨 서진에게 달려들었다. 독침에서 푸른 독액이 뿜어져 나왔다. 서진은 재빨리 몸을 굴려 공격을 피했다. 독액이 떨어진 바닥은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끓어올랐다.
“젠장, 정말 지독하군!”
서진은 영력을 끌어모았다. 미미한 영기가 그의 단전에서부터 팔을 타고 검날로 흘러들었다. 검날에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파영검결(破影劍訣)’ 제삼 초식, ‘섬광(閃光)’. 느려진 영기의 흐름 때문에 과거에 비해 위력은 현저히 떨어졌지만, 필사의 일격이었다.
그는 해골 전갈의 빈틈을 노려 돌진했다. 전갈의 다리 사이, 약해 보이는 관절 부분을 노렸다. ‘쉬이이익!’ 파영검이 공기를 갈랐다. 전갈의 딱딱한 갑옷에 부딪히며 ‘쨍’ 하는 소리가 울렸다. 갑옷은 겨우 흠집만 났을 뿐이었다. 오히려 반격에 밀려 서진은 튕겨져 나갔다.
등 뒤로 전갈의 꼬리가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서진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침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살을 찢었다. 뜨거운 고통과 함께 독액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크윽!”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광기가 스쳤다. 그는 다시 파영검을 고쳐 잡았다.
“한 번 더다… 이깟 벌레 녀석에게 죽을 순 없지!”
그는 의도적으로 전갈의 시야를 벗어나 뒷부분으로 파고들었다. 전갈은 거대한 몸을 돌려 서진을 쫓으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서진은 온몸의 영력을 쥐어짜 검에 집중했다. 파영검결, 이번에는 제오 초식 ‘참영(斬影)’. 그림자를 베어내듯 일격에 모든 것을 걸었다.
‘휘이이익!’ 검이 전갈의 꼬리와 몸통이 연결되는 부위를 파고들었다. 다른 부위보다 상대적으로 갑옷이 약한 곳이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전갈의 몸통에서 끔찍한 비명과 함께 푸른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전갈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그 꼬리가 서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커헉!”
서진은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파영검을 놓지 않았다. 전갈의 몸은 피를 뿜어내며 서서히 움직임을 멈춰갔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몸을 뒤틀며 쓰러졌다.
서진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전갈의 독이 몸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깨와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살아남았다.
“젠장… 정말 고약한 녀석이었군.”
그는 쓰러진 전갈의 몸을 뒤졌다. 기대했던 대로, 전갈의 단전(丹田) 부근에서 푸른색 영단(靈丹)이 빛나고 있었다. 한등 영수의 영단과는 비교도 안 되는 영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영기가 오염되어 있어 정화 없이는 함부로 먹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희망은 있어.”
서진은 전갈의 사체를 뒤로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마다 고통이 따랐지만, 그의 눈빛은 전보다 더 강렬해져 있었다. 협곡의 더 깊숙한 곳으로, 미미한 영기의 파동을 따라 나아갔다.
얼마나 더 갔을까. 협곡의 가장 깊은 곳, 바닥에 거대한 균열이 존재했다. 균열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균열 속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그리고 동굴의 한가운데, 바닥에서 솟아나는 약수가 있었다. 약수는 맑고 투명했으며, 그 안에서 희미한 영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영천(靈泉)이었다! 비록 과거의 영천에 비하면 한없이 미미한 규모였지만, 이 황폐한 세상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진은 끓어오르는 기쁨을 억누르며 영천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영천의 수면 아래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크르르릉…”
영천을 지키는 것은 거대한 검은 이무기였다. 몸 전체에 끔찍한 상처 자국이 가득했고, 비늘은 다 부서져 너덜너덜했다. 이무기 역시 죽음을 코앞에 둔 상태였다. 필사적으로 영천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서진은 파영검을 다시 움켜쥐었다. 독과 출혈로 인해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지만,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 영천은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미안하지만… 네게 양보할 수는 없다.”
이무기는 서진의 말을 알아들은 듯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피할 여유조차 없었다. 서진은 온몸을 던져 이무기의 송곳니를 피했고, 동시에 파영검을 이무기의 턱 아래, 숨통을 노려 찔러 넣었다.
‘푸욱!’
파영검이 이무기의 약점을 꿰뚫었다. 이무기는 마지막 고통스러운 울부짖음과 함께 영천 속으로 쓰러져 들어갔다. 영천의 맑은 물이 붉게 물들었다.
서진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온몸의 영력이 고갈되고, 독이 온몸을 잠식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가는 움직임으로 영천으로 향했다.
붉게 물든 영천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영천의 물은 따뜻했고, 그의 피부에 닿자마자 희미한 영기가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서진은 오염된 영수가 섞인 물을 필사적으로 마셨다. 차가운 물이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그의 몸속에서 오랜만에 느껴지는 활력이 솟아났다. 독이 서서히 중화되고, 고갈된 영력이 조금씩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살았다… 정말… 살아남았어.”
그는 영천 옆에 쓰러져 정신없이 영천수를 들이켰다. 밤이 깊어지고, 동굴 안은 정적만이 흘렀다. 서진은 영천 옆에 기대앉아 명상에 잠겼다. 비록 영천의 물은 오염되어 있었지만, 그의 영력으로 정화하며 수련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의 단전에서 희미한 빛이 샘솟았다. 아주 작은 불씨였지만, 이 불씨가 언젠가는 세상을 다시 밝힐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그의 가슴속에 피어올랐다. 세상은 죽었지만, 그의 영혼은 아직 죽지 않았다. 메마른 영혼의 길 위에서, 서진은 다시 한번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길은, 언제나 그랬듯 고독하고 험난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희망이라는 작은 불씨가 쥐어져 있었으니까.
